12화|침묵하는 기록들

돌아갈 수 없는 진실의 경계

by Helia

“여기… 뭔가 이상해.”

아진은 병원 메인 서버에서 다운로드한 로그파일을 들여다보며 멈칫했다. 차분하던 그녀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화면에 찍힌 숫자들과 문자가 무심히 흐르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정보는 빠져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아주 정교하게 지운 흔적처럼.

민호가 곁에서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노트북 화면이 어둡게 반짝였다가, 다시 뜬 로그 창 안에서 이름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윤재이.’

“시술 당일의 기록에는 분명히 이 이름이 있었어요. 오전 10시 14분, 등록 완료. 그다음 로그는… 12시 17분. 시스템 정기 점검이라는 이름으로 전체 로그 백업이 있었는데, 그 직후—”

“재이 이름이 사라졌어.”

아진이 말을 이었다.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삭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재정의된 것 같아요. 환자 코드도 재사용됐고, 이름은 이후 어떤 문서에도 등장하지 않아요. 마치 그 시간 이후로, 그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진 것처럼.”

아진은 숨을 삼켰다. 사라졌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단순한 실수, 착오라고 보기엔 너무 정제된 흔적이었다. 삭제 시점, 대상, 백업 파일의 경로까지—누군가가 처음부터 '지우기 위한 작업'을 했다는 증거 같았다.

“환자 기록도 복구 불가야?”

“응급 처치 기록, 모니터링 차트, 심전도… 전부 없어요. 환자와 관련된 이름은 한 번만 등장하고, 그 뒤로는 싹 사라져요.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민호가 키보드를 몇 차례 두드렸다. 화면이 전환되며, 병원 CCTV 로그 기록이 떴다.

“당일 오전, 병원 정문에서 윤재이로 추정되는 여성이 들어오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이후 영상이 공백입니다. 10시 28분부터, 병원 전체 CCTV가 18분 동안 녹화되지 않았어요.”

“정전도 없었는데?”

“예. 정전 기록은 없고, 전산팀 기록에도 영상 오류나 장비 고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대의 데이터가 고의적으로 ‘누락’된 것처럼 보여요.”

아진은 모니터를 응시하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의료 사고의 흔적이 아니었다.

“이 병원, 뭔가 숨기고 있어.”

조용히 중얼이듯 말한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민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단순히 시스템 오류나 착오라고 보기엔, 시간대가 너무 정확해요. 누가, 어떤 이유로, 재이라는 사람을… 삭제하려 한 거죠.”

“존재를.”

아진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이름도, 얼굴도, 기록도. 존재 자체를 지운다는 건... 단순한 해킹의 문제가 아니야.”

민호는 고개를 숙이며 이어 말했다.

“생각보다 이 사건, 훨씬 더 커질 수도 있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노트북에서 들려오는 팬 소리만이 사무실 안에 울렸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은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각성하고 있었다.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진은 창밖을 바라봤다. 유리창 너머로는 어두운 거리와 가로등 불빛, 사람 없는 병원의 음산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 병원은 지금도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또 누군가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건 단순한 의료사고가 아니야. 누군가가 어떤 사람의 존재를, 기억까지, 지워버리려 했어.”

그녀의 말에 민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야겠네요.”

“질문?”

“왜 윤재이를 지우려고 했을까. 그녀는 누구에게 어떤 비밀이었을까.”


---

다음 날 오전. 아진은 병원 도면을 펼쳐놓고 다시 확인했다. 구조상 지하 2층은 도면에는 표시되어 있으나, 실제 안내도나 병원 웹사이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하 2층. 여전히 존재를 부정당하는 층.”

그곳이 단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도면 위,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 친 공간. ‘폐쇄된 실험실’이라는 표기가 있었던 곳.

“만약 재이가 그곳에서 깨어났다면… 그 얼굴로.”

지금까지의 모든 조각이, 하나의 그림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병원의 내부 시스템, 사라진 CCTV, 재이의 얼굴, 그리고 존재를 지운 로그.

“이건 사람의 실수로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무 완벽해. 누군가 계획했어.”

그 순간, 민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무명 발신자’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민호가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아진 씨… 서버 접근 기록이 외부에 감지됐어요.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요.”

아진의 심장이 요동쳤다. 이제 이 일은 단순한 조사도, 호기심도 아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무서워할 시간 없어. 이건… 끝까지 가야 해.”

민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사건, 더 깊이 들어가면… 아마, 돌아갈 수 없을 수도 있어요.”

아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이미 돌아갈 곳은 없어. 적어도, 나한테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보다 단호함이 먼저 깃들어 있었다. 침묵하는 기록들. 그 속에 감춰진 진실은 이제, 그녀의 손끝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

며칠 후, 민호는 아진에게 한 통의 메일을 보여줬다. 발신자는 익명이었고, 제목은 단 한 줄.

「그날의 윤재이는, 진짜 윤재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메일 내용을 읽어 내려가며 몸을 떨었다. 첨부된 이미지는 한 장의 사진. 수술복을 입은 여자,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세 사람의 그림자.

“아진 씨, 여기. 이 그림자—”

민호의 손가락이 가리킨 건, 그림자 속 사람 중 하나가 병원장과 닮았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는 전직 국회의원으로 알려진 인물. 세 번째는... 윤지후, 재이의 대학 동기이자 현재 이 병원의 후원자로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사람이 아니었어. 그녀는.”

“사람을 복제하는 실험…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

“윤재이는, 그 실험의 실패작이었을까. 아니면—”

“초기 모델.”

두 사람의 말이 동시에 끝났다.

노트북 화면에 마지막으로 떴던 문장이 다시 아진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Phase III: 복제 시도 예정.’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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