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고, 그 사람은 떠났다
밤이 더 깊어지면, 사랑도 더 짙어진다. 낮의 분주함과 뜨거움이 식은 자리에, 조용히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만 남는다. 도시의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 여름밤,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따끈한데, 그 바람 사이로 건네던 말들, 나지막한 숨결 같은 고백들은 지금도 내 마음에 박혀 있다.
한여름 밤의 로맨스는 유난히 찬란하고, 유난히 짧다.
그 여름, 나는 누군가의 눈빛에 오래 머물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었지만, 사실은 마음이 조금씩 물들고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나눈 인사 뒤에 숨어 있던 떨림을 기억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언제나 조용히 시작된다. 시끄러운 장면이나 큰 사건보다, 자잘하고 별일 아닌 일들 사이에서 스며든다. 그리고 그것이 여름이었다면, 온도가 높아지는 만큼 감정도 쉽게 증폭된다.
내가 그 사람을 처음 좋아하게 된 날도 한여름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선풍기 하나에 기대어 책을 읽던 밤이었다. 땀을 식히려 창밖을 내다봤을 뿐인데, 바로 아래층 마당에서 물을 뿌리던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별 뜻 없는 미소를 지었고, 그 사람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건 분명 사소한 일이었는데, 내 마음은 그때부터 무너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득문득 생각났다. 그의 뒷모습, 그의 팔목, 그가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던 그 여름밤의 골목 소리.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기상청 뉴스는 연일 최고기온 경신을 알렸고, 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우리는 모두 피곤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자주 밖으로 나갔다. 동네 슈퍼에 가는 길에도, 편의점에 물 하나 사러 나갈 때도, 괜히 걷고 싶다는 핑계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밖을 맴돌았다. 혹시 그 사람을 마주칠 수 있을까, 기대하며.
어느 날은, 그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밤마다 산책하세요?”
나는 당황해서 “네?”라고 되물었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요즘 자주 보이시길래요.”
그 말이 그렇게도 설렐 일이었을까. 가슴이 터질 듯 뛰던 그 순간, 나는 얼떨결에 “더워서요”라고 말했지만, 속마음은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기가 더 번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이고 마주쳤고, 몇 번이고 얘기를 나눴다. 심지어 우산도 함께 썼다. 갑작스러운 소나기 속에서,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고, 나는 그 짧은 거리 안에서 그의 체온을 느꼈다.
사랑이란, 시작되었다는 걸 알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는 감정이다.
계절이 그러하듯, 감정도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여름은 시작되기 전보다, 끝나고 나서야 그 여름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 사람과 함께였던 그 여름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가 내게 머물렀던 온도, 그가 내게 남기고 간 흔적의 깊이, 그 모든 것이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후에야,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걸.
우리는 연인이 되지는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조차도,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은 어느 날 짐을 싸고 이사를 갔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의 소식을 뒷문으로 들었고,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그 여름을 홀로 보내야 했다. 떠난 자리는 쉽게 비워지지 않았다. 여름밤의 자리에 그의 목소리가 남았고, 골목의 어둠 속엔 그의 그림자가 스며 있었다.
나는 그 여름 이후로,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마주쳤던 벤치, 함께 먹던 아이스크림, 나란히 걷던 자전거 도로, 그 모든 풍경은 시간이 지나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여름이 올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를 때, 찬물에 손을 담글 때, 불현듯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나는 문득 그리워한다.
한여름 밤의 로맨스는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짧았던 만큼 더 강렬하다.
서늘한 가을이나 차가운 겨울에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종류의 열기와 감정이 있다.
그 밤엔 별이 뜨고, 바람은 눅눅하며, 모기 소리도 배경음처럼 흘러간다. 어딘가 흐릿하고 어딘가 흐물거리던 그 감정들 사이에, 우리는 잠깐 사랑을 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눈빛과 숨결로. 그리고 그 밤이 지나고 난 후, 모든 건 흩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계절은 아무렇지 않게 찾아왔다.
그럼에도 나는, 그 여름을 잊지 못한다.
잊고 싶지도 않다.
계절은 지나가고, 사람은 떠났지만, 마음에 남은 여름밤의 온도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한여름 밤에 불어온 바람처럼.
짧고 뜨겁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감정.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확실하게 존재했던, 그런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