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걷고 싶다. 산티아고로

다시 나를 믿는 순간

by Helia

어느 날,
나는 걷고 싶어졌다.
아주 멀리, 아주 오래.
누구도 알지 못하고,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땅을
끝없이 걷고 싶었다.

마음이 고장 났다고 느꼈을 때,
무언가를 ‘시작’하기보다
‘그냥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책상 앞에서는 아무리 다이어리를 써도
내 인생이 정돈되지 않았고,
이불속에서는 아무리 울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럴 때 떠오른 이름.
산티아고 순례길.

그 길을 걷고 싶다는 바람은
사실 단순한 여행의 욕망이 아니었다.
그건 나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길이자,
결국 나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의 프랑스 국경 근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약 800km의 먼 길이다.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의 별길’을 따라 걷는다.
아침이면 발을 내디디고,
저녁이면 낯선 마을에 머문다.
모두가 땀에 절고,
발에 물집이 잡히고,
가끔은 울고,
가끔은 웃는다.

그곳엔
어제의 직업도,
오늘의 성과도,
내일의 계획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걷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끝까지 걷고 싶다는 마음.

**

나는 상상해 본다.
나의 발아래, 낡은 돌길.
오른쪽에는 올리브나무가 드리우고
왼쪽에는 황금 들판이 펼쳐져 있다.
가방은 무겁고,
목엔 땀이 흐른다.
속으로 백 번쯤 ‘왜 왔지’라고 되묻다가도
문득,
저 멀리 보이는 순례자 표지석을 보며
다시 걷는다.

그렇게 걸으면
무너졌던 내 마음도
조금은 정리되지 않을까.

내가 걷고 싶은 건
단지 길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들을 묻는 무덤이자,
새로운 생을 심는 밭이다.

**

순례는 종교적 의례일 수 있다.
하지만 내게 그 길은
기도가 아니라 고백이다.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마음,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슬픔.
그것을 걸음으로 푸는 길.

나는 그 길에서 울고 싶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말없이 울고 싶다.
참았던 문장들,
삼켰던 감정들,
되돌릴 수 없었던 선택들.

그 모든 것들을
발밑의 흙길에 하나씩 묻고,
눈물이 마르면
다시 일어나 걷고 싶다.

**

나는 요즘
‘나조차 나를 모를 때’가 잦아졌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겠고,
언제부터 웃음이 가식이 되었는지도 헷갈린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버텨야 하다 보니 무뚝뚝해졌고,
사랑하고 싶었는데
상처받지 않기 위해 멀어졌다.

그럴 때마다 생각난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그 길,
그 길 위의 나.

사람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보이기 위해 살지만,
때로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내 안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

누군가 그러더라.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사람은
다른 걸 바라는 게 아니라
다시 걷고 싶다는 바람 하나만 남는다고.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 그건 사랑과도 닮았구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번 다녀오면
다시 떠나고 싶어지는 그 마음.

나는 그 사랑을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이미 수백 번 그 길을 걸었다.

언젠가는
진짜로 걸을 거다.
낡은 운동화에,
딱 한 벌 옷만 가방에 넣고,
비행기를 타고,
아무도 없는 새벽에
혼자 길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발을 내디디는 순간,
나는 분명 울고 있을 것이다.

**

내가 원하는 건
인생을 바꾸는 극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단지,
이 인생에서
다시 나를 믿을 수 있는 순간을
마주하고 싶을 뿐이다.

그게 산티아고의 길이든,
내 방 앞 골목이든,
어디든 괜찮다.

중요한 건
걷는다는 것.
그리고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것.

**

내가 산티아고에 끌리는 이유는
그곳의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 길은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단 하나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무슨 후회를 품고 있는지
묻지 않는 땅.

그 위를 걷고,
숨을 쉬고,
가끔 멈춰 서고,
다시 걷는다.

끝에는 대성당이 있다지만
사실 도착이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나 스스로와 함께 걷는다는 사실.

**

글을 쓰는 지금도
창밖엔 바람이 분다.
어딘가에서는
정말로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이곳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이미
산티아고 어딘가,
황톳빛 돌길 위를 걷고 있다.

나도 곧 따라갈 거다.
오늘은 마음으로,
내일은 발걸음으로.

그 길이 끝날 때,
나는 다시 내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믿고 싶다.
걸음이 내게 말을 걸어올 것이라는 걸.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그 조용하고 단단한 목소리.

“괜찮아. 우리는 지금, 걷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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