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

조금 더 따뜻한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by Helia

비 오는 날이었다.
조문객으로 가득한 장례식장 안, 나는 꽃잎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운구차가 떠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간 뒤에도 나는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다.
흙냄새에 섞인 비 냄새, 식지 않은 눈물, 입안에 맴도는 "조심히 가세요"라는 말들.
그 속에서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속삭였다.
‘다음 생엔, 꼭.’

그 말은 이상하게도, 포기할 때 나온다.
이 생에서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겠을 때, 끝내 도달하지 못했을 때, 마지막까지 밀어붙일 용기가 없을 때.
그때 사람들은 조용히 이 말로 물러선다.
희망처럼 들리지만, 실은 체념에 더 가깝다.
애써 미련이 아니라는 듯, 다음 생이라는 이름의 종잇장에 마음을 접어 넣는다.

어릴 적엔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다음 생엔 우리가 꼭 다시 만나자."
"다음 생엔 엄마가 네 딸로 태어날게."
그건 마치 아이처럼 순진한 소망 같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보니 알겠다.
다음 생이라는 말은 이 생에서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

나는 다음 생이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오래전 한 사람을 떠올린다.
우리는 잘못된 타이밍에 만났고, 서로가 미완의 사람일 때 사랑했고, 결국은 상처로 남았다.
그 시절의 우리는 너무 어렸다. 감정이 오가는 방법도, 아픔을 다루는 방법도 몰랐다.
나는 도망쳤고, 그 사람은 붙잡지 않았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흩어졌다.
그리고 몇 년 뒤,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다정하던 말투는 없었고, 따뜻했던 시선도 사라졌다.
그저 "잘 지냈어?"라는 말만 남았다.
그 한 마디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상상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시절, 다른 삶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
만약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이라면,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

나는 종종 그런 장면을 그려본다.
늦여름의 작은 마을.
노을빛이 흐르는 강가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깨가 살짝 닿을 정도의 거리, 조용한 바람, 익숙한 온기.
그 사람은 말한다.
“이번엔 늦지 않았어.”
나는 웃는다.
이 생에서는 하지 못했던 웃음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되는 미소로.

이런 상상을 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아리다.
그건 다정한 상처다.
현실이 허락하지 않은 장면을 머릿속에서라도 되돌려보려는, 작고 조용한 몸짓이다.

**

하지만 나는 가끔 묻는다.
다음 생이 정말 있는 걸까.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영혼은 다시 누군가의 모습으로 태어나는가.
이 모든 상상이, 실은 나의 비겁함일 뿐이진 않을까.
이 생에서 마주하고 고백하고 붙잡지 못한 나의 회피가 아닐까.

‘다음 생에 만나자’는 말은 어쩌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다정한 척, 진심인 척 하지만 결국은 이 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다음 생을 기다리기보다, 지금의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덜 미워하고, 덜 후회하고, 덜 망설이기.
덜 미루고, 덜 감추고, 덜 두려워하기.
이 생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사람이 다음 생을 입에 담을 자격은 없다는 생각도 든다.

**

할머니는 내게 말했다.
“사람은 좋은 사람 되기 위해 여러 생을 사는 거야.”
그 말의 의미를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더 나은 마음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계속 태어나고 또 살아가는 거다.

나는 다음 생에서 누군가에게 덜 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하되 불안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떠나되 조용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되 침묵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다음 생을 말하기보다,
이 생에서 더 노력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이 말이, 오늘의 이 다정함이, 이 생에서 닿을 수 있었으면.

**

하지만 여전히 다음 생을 그리게 되는 날들이 있다.
문득 떠오른 이름 하나, 문득 들려온 목소리 하나에
‘다음 생엔’이라는 말이 조용히 피어난다.

다음 생에는
너를 처음 본 그 순간, 마음이 먼저 기억하면 좋겠다.
이번 생처럼 후회하지 않도록.
말을 미루지 않고, 사랑을 머뭇거리지 않고, 상처 주지 않도록.

다음 생에는
비 오는 날, 나 혼자 우산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와 같이 쓰는 우산의 좁은 거리만큼,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다음 생에는
그저 조금 더 따뜻한 나였으면 좋겠다.
말보다 먼저 다가가는 사람, 사랑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이름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

그리고 언젠가,
지금 이 삶이 전부 다 지나간 뒤
다시 어딘가에서 너를 만난다면,
나는 말없이 손을 내밀 것이다.

“이번엔 끝까지 함께할게.”

그 한마디를, 이번 생엔 끝내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오늘, 나는 더 다정하게 살아보려 한다.
다음 생을 기다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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