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거 좋아해? 퇴폐, 섹시, 집착, 다정

나는 끝까지 다정을 믿고 싶다

by Helia

어떤 사람은 퇴폐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잔향처럼 남는 무너짐, 침묵 속의 절망, 눈동자에 밴 허무.
어떤 사람은 섹시함을 좋아한다고 했다.
선을 넘나드는 유혹, 뭔가를 파괴하고야 마는 짜릿함.
누군가는 집착이 주는 강렬함을 원한다 했다.
온전히 나에게만 쏟아지는 감정, 무섭도록 애타는 시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항상 조용히 물러나곤 했다.

나는 그런 감정보다, 다정함이 좋다.
가장 덜 자극적이지만, 가장 오래 남는 감정.
파괴하지도 않고, 내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고, 대신 가만히 곁에 남아 있어 주는 감정.

다정은 과장된 말투도, 뜨거운 키스도, 화려한 선물도 아니다.
그건 늘 작은 몸짓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뛰어가는 나를 멀리서 보고,
우산을 나눠주려고 한참을 따라 뛰어온 사람의 헐떡임.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목 괜찮아?” 하고 묻는 조용한 목소리.

다정은 흔히 말하는 ‘어장관리’의 기술과는 닮지 않았다.
다정한 사람은 끝까지 다정하다.
호감을 얻기 위해 잠시 친절한 척하지 않는다.
사람을 혼란에 빠뜨릴 정도로 오락가락하지도 않는다.
그저 처음처럼, 언제나처럼,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지나치게 되는 그런 태도.

그래서 다정은,
가장 쉽게 잊히고, 가장 나중에 떠오른다.
가장 늦게 그리워지고, 가장 오래 아프게 남는다.

**

예전의 나도 한때는 퇴폐적인 분위기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
어딘가 망가진 사람,
불안정해서 자꾸 불 꺼진 창문에 불을 켜보고 싶은 사람.
내가 보듬어주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착각.
그러다 결국 나만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 후엔 섹시한 사람에게 끌렸던 시기가 있었다.
무언가를 압도하고, 장악하는 사람.
마치 그 사람이 나를 구원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구원이 아니라 지배를 원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집착하는 사람을 만났다.
모든 말과 행동을 해석하고, 모든 하루를 감시하고,
‘그만하자’는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너 없이는 안 돼’라는 말로 나를 붙잡던 사람.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공포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왔다.
처음으로 내가 좋아했던 감정.
그러니까 다정함.

**

다정한 사람은 나를 대신해서 정리해주지 않는다.
내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내 감정을 끝까지 다 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항상 ‘여기’ 있다.
도망가지 않는다.
무리해서 날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말없이 옆에 있다.

다정함은 느긋한 감정이다.
경쟁하지 않고, 증명하지 않는다.
누가 더 사랑하는지 재지 않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느껴지는 감정.
소리 지르지 않아도,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감정.

어릴 때, 나는 다정한 사람을 과소평가했다.
조용해서 재미없고, 나를 뜨겁게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건 항상 조용한 것들이라는 걸.
불꽃보다, 햇살이 오래가고,
소리보다, 숨결이 오래 남는다는 걸.

**

사람은 누구나 지쳐가는 순간이 있다.
퇴폐를 좋아하던 사람도,
섹시함에 열광하던 사람도,
집착에 안도하던 사람도.

결국 끝에 가서는 다정을 그리워하게 된다.
다정은 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 게 아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이별과 다툼,
지치고 부서진 끝에
비로소 ‘아, 그게 사랑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는 것.

나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사람이다.
그래서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다.
눈부시지 않아도 괜찮다.
질투나 열정으로 내 하루를 흔들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말없이 내 곁에 있어주는 다정함.

나는 그 감정을 믿고 싶다.
끝까지.

**

퇴폐는 아름답지만 파괴적이고,
섹시는 매혹적이지만 잠시뿐이며,
집착은 뜨겁지만 결국 불타고 만다.
하지만 다정은 다르다.
그건 사람을 살리는 감정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감정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때,
나는 다시 다정해지고 싶어진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하지 않든,
내가 그를 좋아하는 방식은 다정함이길 바란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 준다면,
나는 그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싶지 않다.
기대하게 만들지도, 고의로 멀어지지도 않고,
늘 같은 눈높이에서,
늘 같은 따뜻함으로,
그 사람 곁에 조용히 있고 싶다.

그게 내가 믿는 감정이니까.
그게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은 다정함이니까.

나는 끝까지 다정을 믿고 싶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더라도,
끝내 나를 살린 건 언제나 그 감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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