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끝, 마음의 시작
하루가 저물고, 세상이 한 톤 낮아지는 시간. 창문을 열면, 어둠이 고요하게 번진다. 시계는 열한 시를 가리키고, 우리는 그 시간에야 비로소, 진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퇴근 후 겨우 도착한 집의 현관 앞, 누군가에게는 침대 맡에 앉아 숨을 고르는 고요의 순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깊은 외로움과 마주하는 감정의 터널.
내게도 밤 열한 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무언가를 끝내고도 아직 끝난 것 같지 않은, 시작과 끝 사이의 애매한 시간. 텅 빈 컵을 손에 쥐고 한참을 바라보다, 무심코 창밖을 보면 도시의 불빛이 수천 개의 마음처럼 깜빡이고 있다. 그 불빛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하루가 담겨 있을 것이다. 기쁨, 슬픔, 사랑, 회한, 고백, 후회. 모든 감정이 그 시간 속에, 조용히 가라앉는다.
나는 종종 그 밤의 온도와 마주한다. 낮에는 너무 시끄러워서 들리지 않던 내 마음의 목소리가, 밤 열한 시쯤이 되면 또렷하게 들린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많이 했는지,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고,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지. 바쁘다는 이유로, 괜찮다는 핑계로 밀어두었던 감정들이 서랍을 박차고 나오는 시간. 내 안의 말들이 줄지어 앉아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글을 쓸 때도, 주로 밤 열한 시에 시작한다. 낮의 언어는 너무 가볍고, 아침의 문장은 어딘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밤, 특히 열한 시쯤의 문장들은 속이 꽉 차 있다. 조용하지만 무겁고, 말은 적지만 깊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는 느낌. 이 시간의 단어들은 그렇다.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감정들. 한 문장에 두세 겹의 감정이 배어 있다.
밤 열한 시의 집은 유독 고요하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마저 더 크게 들린다. 냉장고의 진동음, 고양이의 하품, 가끔 울리는 핸드폰 진동. 모든 소리가 귀에 꽂힌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지나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정했던 말투, 그리웠던 눈빛, 미처 하지 못한 말들. 시간은 지나도 기억은 흐르지 않는다. 밤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것만 같다. 과거가 더 선명해지고, 마음속으로만 수천 번 되뇌었던 말들이 자꾸 떠오른다.
예전에는 밤을 두려워했다. 어둠이란 게, 괜히 불안했고 쓸쓸했으니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깨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커다란 외로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 쓸쓸함이 싫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야말로, 내가 나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으니까. 어쩌면 사람은 낮보다 밤에 더 많이 성장하는지도 모른다. 낮에는 타인의 시선을 살아야 하지만, 밤은 내 안의 나로 살아야 하니까.
밤 열한 시쯤의 거리도 좋아한다. 차가 한두 대 지나가고, 도로는 텅 비어 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림자만 길게 드리운 채, 사람도 적고, 소리도 적다. 그런 시간에 산책을 나가면, 마치 내가 세상의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거리를 걷다가,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다. 피곤함, 외로움, 홀가분함, 그리고 뭔지 모를 미련이 섞인 표정. 그 얼굴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이, 묘하게 아프고도 다정하다.
누군가는 밤 열한 시에 사랑을 고백했고, 누군가는 이별을 통보받았다. 어떤 이는 그 시간에 고속버스를 타고 타지로 떠났고, 또 다른 이는 맥주 한 캔에 혼잣말을 시작했다. 그 모든 순간은 작고 사소하지만, 어느 누군가의 인생에선 결코 잊히지 않을 중요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밤 열한 시는 그렇게 많은 인생의 갈피들을 품고 있다. 깊은 상념, 꾹 참고 있던 눈물, 조심스럽게 건넨 손끝의 떨림. 모든 게 그 시간에 깃든다.
나는 그런 밤이 좋다. 누군가는 잠들고, 누군가는 깨어 있고, 누군가는 끝을 준비하며, 또 누군가는 다시 시작을 다짐하는 시간. 낮의 세계가 잦아들고, 진짜 마음들이 스며드는 밤 열한 시. 우리는 그 시간에 진실해지고, 고요해지며, 무엇보다 나약해진다. 그리고 그 나약함이 인간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
어릴 적 할머니는 항상 그랬다. “밤 열한 시 넘기면 생각이 괜히 많아진단다.” 정말 그랬다. 그 시간만 되면 괜히 할 말을 꺼내고,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한숨을 쉬거나, 말없이 등을 돌리고 눕거나.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쌓여서 사람이 자라고, 단단해진다는 걸, 지금은 안다. 그 밤의 생각들이 결국 나를 만들었고, 나를 이해하게 해 주었으니까.
이제 나는 밤 열한 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는 습관이 생겼다. 그 안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내 하루를 천천히 되짚는다. 실수도, 성공도, 웃음도, 울음도 그 안에 섞여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한 후에야, 진짜 쉼이 시작된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밤 열한 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창밖엔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고양이는 작은 숨소리를 내며 내 옆에서 잠들어 있다. 컵 안의 차는 식어가고, 내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오늘의 끝에서, 내일의 시작을 준비하며, 나는 여전히 이 조용한 시간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마음으로, 더 솔직한 말들로 살아가겠다고.
밤 열한 시는 늘 그렇게, 나를 한 뼘 더 어른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