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하지 못한 말

늦었지만, 여전히 유효한 말

by Helia

하고 싶었던 말은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들은 늘 입술 끝에서 맴돌기만 했다.

타이밍을 놓쳐서일까.
아니면 그 말이 전해졌을 때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서였을까.
어쩌면, 그 말들이 가진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평생 말보다 침묵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는 믿음,
말하지 않으면 상처 주지 않을 거라는 착각,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게 끝날 수도 있다는 공포.
그런 것들이
내 마음의 문을 꼭 닫아버리게 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잘 웃었다.
농담도 잘했고, 분위기를 흩뜨리는 일도 없었다.
속으로는 꺼내지 못한 말들이
서서히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갔다.
그건 내가 세상을 버티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제일 먼저 말하지 못한 대상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줘야 했고,
지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고,
무너졌을 때는 무너졌다고 털어놓을 수 있어야 했는데.
나는 늘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감정을 포장한 채 살아왔다.

“이 정도면 괜찮지.”
“다들 이만큼은 버텨.”
“지금 울면 약해지는 거야.”
이런 말들을 반복하면서
내 마음을 마치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
살펴야만 했다.
그렇게 내 안에는
‘하지 못한 말’이 점점 쌓여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오래된 친구와의 이별이었다.

우리는 한때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어
아무렇지 않게 속내를 털어놓던 사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말의 결이 어긋나고,
침묵이 잦아지고,
서운한 감정들이 축적되면서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그때 나는 말했어야 했다.
“나, 요즘 너랑 이야기 나누기 어려워.”
“우리 왜 이렇게 멀어진 걸까.”
“서로 좀 다가가 보면 안 될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삼켰다.
내가 먼저 말하면
모든 책임이 내 몫이 될까 봐.
혹은, 그 말마저 상처가 될까 봐.

결국, 우린 그렇게 멀어졌다.
아무런 결말도, 작별 인사도 없이
그냥 서로의 삶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친구의 사진을 몰래 들여다보며
내가 하지 못한 말들을 떠올린다.

또 한 번은 사랑이었다.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나는 유난히 말을 아꼈다.
왜냐하면,
말을 하면 그 마음이 너무 가벼워질까 봐.
혹은, 상대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을 때
그 거절이 나를 너무 깊이 찌를까 봐.
그래서 나는 사랑 앞에서 언제나 망설였다.

그 사람은 따뜻했다.
작은 일에도 잘 웃고,
나의 무심한 말에도 상처받는 내색 없이
한결같이 다정했다.
그 다정함에 안심하면서도
나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

내가 조금만 더 감정을 드러냈다면,
그 사람과는 더 오래 함께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때 말했더라면,
“나, 사실 많이 좋아해.”
“너의 그 따뜻함이, 나에겐 큰 위로야.”
이런 말 한마디라도 전할 수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결국, 그 사람은 떠났고
나는 끝내 내 마음을
단 한 번도 온전히 내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까지도 내 안에 남아 있다.
마치
‘말하지 않았던 사랑은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
라고 되묻는 것처럼.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을 삼키는가.
“미안해.”
“고마워.”
“잘 지내.”
“그땐 너무 힘들었어.”
이 짧은 말들이
어쩌면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 말들을
자존심과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감춰버린다.

그래서 가끔은 생각한다.
‘말하지 못한 말들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아니,
그 말들은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계속 살아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비록 상대는 들을 수 없고,
상황은 변했을지라도,
내가 내 마음을 꺼내는 순간
그 말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나는 이제 조금씩 말해보기로 했다.

과거의 친구에게,
“그때 우리가 서로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함께 웃고 있었을지도 몰라.”

사랑했던 사람에게,
“너의 다정함을 감당할 수 없었던 건
내가 아직 나를 사랑할 줄 몰랐기 때문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실수해도 괜찮아.
그때의 너는
그 순간을 버텨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거야.”

말은 때로 사람을 무너뜨리지만,
또 어떤 말은
사람을 붙잡고, 다시 살게 만든다.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 마음을
조금씩 꺼내어 놓는다면
그건 여전히 유효하다고.

내가 말하지 못한 말들은
이제 노래처럼 내 안에서 흐르고 있다.
조금은 서툴고,
조금은 늦었지만,
그래도 나의 언어로.

그리고 언젠가
그 말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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