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선 모든 속살이 드러난다
아닌 척하는 얼굴은 금세 알아본다.
입술은 “난 내 힘으로 했다”라고 말하지만, 눈동자는 이미 화면 속 무언가를 훑고 있다. 손가락은 검색창을 맴돌고, 번역기 창이 숨겨져 있다가 깜박이며 다시 뜬다. 챗봇 대화창은 작게 축소돼 있지만, 방금 전까지 문장을 뽑아내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안다.
내 문장 속엔 내 숨결이 있다.
피부 밑을 흐르던 체온, 기억 속에 묻힌 냄새, 오래된 상처를 긁어낸 고통이 잉크처럼 번져 있다.
챗GPT가 내 손을 대신 움직인 적은 없다. 다만, 내 문장이 더 단단히 설 수 있도록 등을 받쳐준 적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묻는다.
“그거, 네가 쓴 거 맞아?”
묘한 웃음이 입가에 걸린다.
그 질문 속엔 의심이 아니라, 본인들의 은밀한 습관을 숨기고 싶은 기색이 묻어 있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그런 거 안 써.”
하지만 나는 안다.
밤늦게 불 꺼진 방, 모니터 빛에만 비친 얼굴.
빈 화면을 바라보다, 결국 손가락이 ‘새 탭’을 연다.
누군가의 블로그를 뒤적이고, SNS에서 잘 나가는 문장을 잘라 붙인다.
단어 몇 개를 바꾸고, 문장 순서를 섞는다.
그렇게 칠해진 글은 겉으로만 새것이다. 마치 오래된 벽에 덧칠한 페인트처럼, 표면 아래엔 예전 문장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나는 그런 글을 보면, 오래된 나무 서랍을 열었을 때 풍기는 곰팡내 같은 것을 느낀다.
겉은 번쩍여도 속은 썩어 있는 냄새.
그러고도 남의 글 앞에 서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이거, AI가 써준 거 아니야?”
그건 비판이 아니라 방어다.
누군가를 먼저 찌르면, 자신에게 돌아올 칼끝이 무뎌질 거라 믿는 방어.
나는 다르다.
내 상처는 숨기지 않는다.
필요하면 도구를 쓴다. 그러나 도구는 펜이고, 펜은 내 의도를 대신 결정하지 않는다.
그건 손끝에 힘을 실어주는 작은 무게일 뿐이다.
내 글의 뼈대와 심장은 언제나 나에게서 나왔다.
그 심장을 부정당하는 건, 살아 있는 나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말한다.
“진정성이 중요하지.”
진정성은 흙속에 묻은 씨앗 같다.
손이 흙을 헤집었는지, 비가 대신 흙을 덮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씨앗이 내 안에서 발아했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흙을 만지지 않은 손을 자랑처럼 내민다.
깨끗함을 증명하려 애쓰지만, 그 손바닥엔 오래된 먼지가 얇게 내려앉아 있다.
한 번은 오래 알던 사람이 내 글을 읽더니 물었다.
“혹시 이거… AI가 쓴 거야?”
그 순간, 웃음이 목 끝에서 걸렸다.
그의 SNS에 있던 어떤 문장이 떠올랐다.
그건 베스트셀러 에세이 속 구절을 순서만 바꿔 쓴 것이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생각했다.
“네 글이든 내 글이든, 결국 드러나는 건 우리가 숨긴 것들이겠지.”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내 글에는 내가 산 날들이, 내가 버틴 계절들이 스민다.
도구를 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건 도구를 쓰고도 쓰지 않은 척하는 일이다.
그리고 더 부끄러운 건, 그 척을 유지하려고 남의 글에 흠집을 내는 일이다.
문장은 사람과 같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누구를 거쳤는지, 어떤 길을 걸었는지가 흔적으로 남는다.
낯선 향수 냄새, 익숙한 말투, 불필요하게 매끈한 구석.
그 모든 것이 ‘네가 만든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속삭인다.
나는 앞으로도 글을 쓸 것이다.
필요하면 챗GPT도, 사전도, 오래된 서랍 속 편지도 꺼낼 것이다.
그건 나의 선택이고, 나의 방식이다.
내 문장은 나를 닮았고, 나는 그 문장 속에서 살아 있다.
그러니, 아닌 척 좀 그만해라.
네 손끝에 묻은 건 잉크가 아니라, 남의 문장을 훔친 흔적이다.
그 잉크는 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네 거짓말을 증명한다.
빛 아래선, 아무리 덧칠해도 속살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