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 닫힌 밤
문이 열린 채로, 나는 갇혔다.
발끝에서부터 스며드는 서늘한 공기가 다리를 타고 오르고, 숨결 사이사이로 어둠이 스며든다. 유리창 밖의 빛은 이미 물러갔고, 남은 것은 창문에 들러붙은 빗방울 몇 개와 벽을 타고 내려오는 고요뿐이다. 밤이 내 목을 천천히 조여오기 시작했다.
낮 동안 나를 지탱하던 것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의 웃음, 창밖으로 스치는 바람, 길모퉁이의 소음. 그 모든 것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건, 나라는 울림 없는 껍질이다.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구멍 깊숙이 이끼가 자라는 듯 답답하다. 벽시계 초침이 금속성을 띠며 톡, 톡, 어둠 속에 울린다. 그 규칙적인 박동은 나를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로프처럼 팽팽하다.
밤은 친절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그러나 발을 들이는 순간, 바닥이 꺼진다. 낮에 보지 못했던 균열들이 밤이 되면 입을 벌린다. 하찮아 보였던 한마디, 웃음 뒤에 숨은 표정, 흘려보낸 기회들이 서랍 속 오래된 편지처럼 풀려 나온다. 기억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가끔은 찌르듯 날카롭고, 때로는 습기 찬 천처럼 차갑게 달라붙는다. 나는 그 기억들의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이 방 안을 빙빙 돈다.
창밖을 바라보면, 멀리 아파트 불빛이 띄엄띄엄 켜져 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휘어지고, 곧 잘려나간다. 그 움직임 속에 시간은 흐르는데, 내 몸은 제자리에 고여 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이방인 같다. 눈동자는 깊은 물 밑에 가라앉아 있고, 입술은 닫힌 문처럼 굳어 있다.
밤은 입을 다물게 한다. 낮에는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던 일들이, 여기선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때 왜 침묵했지?”
“왜 그렇게밖에 못 했어?”
묻는 이도, 답하는 이도 나다. 하지만 대답은 늘 늦고, 그 사이에 다른 장면이 틈입한다. 웃음소리였던 것이 울음소리로 변하고, 환하게 빛나던 순간이 잿빛으로 바래진다. 모든 장면은 나를 더 깊은 밤 속으로 밀어 넣는다.
가끔은 이 갇힘이 안락하다. 벽과 천장이 나를 둘러싸고, 바깥의 어떤 것도 닿지 못한다. 불빛 하나 없는 숲 속에 숨어 있는 기분. 그 안에서 숨을 고르고, 하루를 되짚고,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다. 그러나 오래 머물면 공기가 변한다. 처음엔 은은하던 어둠이 곧 진득하게 달라붙어 숨통을 죈다. 문손잡이를 돌려도 헛돌고, 발걸음을 옮겨도 바닥은 제자리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아직은 나갈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버텨.”
그러다 새벽이 온다. 커튼 틈 사이로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든다. 벽에 걸린 그림자들이 서서히 모양을 잃고, 바닥 위 어둠이 후퇴한다. 어제보다 얕아진 밤이 나를 놓아준다. 이 갇힘은 내가 부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풀어주는 것이었다.
아침의 빛은 무심하다. 방은 여전히 어제와 같은 모양이지만, 그 안을 채운 공기는 다르다. 창문 너머로 바람이 밀려오고, 거리의 소리가 틈새로 스며든다. 낮의 리듬이 다시 나를 세상으로 끌어올린다. 나는 안다. 오늘 밤에도 다시 이 방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숨 쉬는 법을 조금은 더 알게 되었을 것이다.
밤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나를 가두는 동시에 나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그 속에서 나는 무너지고, 흩어진 조각을 하나씩 주워 담는다.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내 얼굴이 있다. 그래서 이 감옥은 완전한 벌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숨구멍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도, 나는 이 방 안에 앉아 있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나를 붙드는 건 열쇠가 아니라 그림자다. 어쩌면 이 갇힘은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나는 숨을 쉰다. 갇힌 건 나지만, 열쇠도 결국 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