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

보내지 않은 말, 보내야 할 마음

by Helia

읽음 표시만 켜놓고 하루를 버틴 적이 있다.
화면 속 짧은 문장이 내 눈을 사로잡았지만,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 마음을 한 줄 안에 가두면,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질까.
그 무게를 가늠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하루가 저물었다.

살다 보면, 답장 하나가 관계의 모든 온도를 바꿔놓을 때가 있다.
짧은 “응”과 “아니” 사이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숨어 있다.
그 한 줄이 서로의 거리를 한 뼘 가까이 당기기도 하고, 한순간에 멀리 밀어내기도 한다.
어떤 날은, 답장을 보내는 속도와 방식이 그 사람의 마음을 대신 말해준다.

어릴 적의 답장은 단순했다.
궁금한 건 물었고, 들은 건 바로 답했다.
속도가 빠를수록 마음이 가깝다고 믿었고, 길게 이어지는 대화가 곧 애정의 증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알았다.
답장이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과 망설임, 때로는 계산이 섞인 행위라는 것을.
그 안에는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뿐 아니라, 숨기고 싶은 것도 함께 담긴다.

가장 어려운 답장은, 하고 싶지만 보내지 않는 답장이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 썼다 지운 문장은 점점 길어지고, 감정은 무거워진다.
마침내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선택일 때가 있다.
상대의 반응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차라리 침묵이 더 정직할 수 있다.

반대로, 너무 빨리 보내버린 답장도 있다.
감정이 아직 뜨거울 때, 숨 고르기 전에 내보낸 말은 종종 후회로 돌아온다.
그때는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말이 관계를 갉아먹었음을 깨닫는다.
문장은 지울 수 있어도, 이미 읽어버린 마음은 되돌릴 수 없다.

답장이 늦어질 때, 그 사이엔 상상이 쌓인다.
‘왜 안 읽을까?’, ‘읽었는데 왜 안 보낼까?’, ‘혹시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상대의 하루를 추측하고, 표정을 그려보고, 목소리 톤을 상상한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보다 내 마음이 더 피곤해진다.
현실보다 더 잔혹한 건, 내가 만든 상상의 무게다.

답장은 때때로 사랑의 온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빠른 답장이 반드시 진심을 담은 건 아니고, 늦은 답장이 꼭 무심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답을 보낸다.
그 속도가 다를 뿐, 마음의 방향이 같은 경우도 많다.

나는 한때 답장을 기다리는 데 서툴렀다.
기다림은 곧 불안이었고, 불안은 의심으로 번졌다.
그러다 알았다. 기다림에도 결이 있다는 걸.
초조함 속에서 무너지는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조용한 신뢰 위에서 자라는 기다림도 있다.
후자는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단단하다.

가장 아름다운 답장은 말이 아닐 때가 있다.
한 번도 “사랑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함께한 시간 속에서 이미 충분히 대답한 관계.
굳이 문자로 확인하지 않아도, 서로가 남긴 흔적이 답이 되는 사랑.
그건 메시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마음이 닿아 있는 상태다.

이제 나는 답장을 서두르지 않는다.
단순히 미루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 내 마음을 가다듬는다.
상대에게 도착했을 때, 불필요한 가시가 빠져 있기를 바라서다.
가끔은 아주 짧은 문장 속에, 오랫동안 고른 단어를 담아 보낸다.

보내지 않은 답장도 있다.
그건 미완의 문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이미 끝낸 이야기다.
전하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 혹은 전해도 달라질 수 없는 마음.
그 답장은 내 안에서 조용히 닫히고, 관계도 그와 함께 멀어진다.

우리가 주고받는 건 결국 문장이 아니라 마음이다.
답장은 그 마음의 형태를 빌려 나온 언어일 뿐이다.
중요한 건 길이도, 속도도, 맞춤법도 아니다.
그 마음이 진짜였느냐, 그 한 가지다.

오늘,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잘 지내?’
예전 같으면 바로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폰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안다. 답장은 단순한 반사가 아니라, 나의 온도를 담아 보내는 것이라는 걸.
잠시 더 기다렸다가, 그 온도가 적당해졌을 때 보내려고 한다.

아마 오늘, 당신이 보낼 답장은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어떤 답장을 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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