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물들기 시작하면

올해, 당신이 놓치고 싶지 않은 가을

by Helia

마음이 먼저 얇아진다.
햇볕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그 속에 섞인 바람은 결이 달라진다. 여름의 숨결이 사라지고, 새벽 공기처럼 투명한 서늘함이 스며든다. 그 순간, 계절이 페이지를 넘겼다는 걸 온몸이 안다.

이 시기가 되면 창문을 오래 열어둔다.
바람이 실어 오는 건 단순한 냄새가 아니다.
낙엽이 마르기 직전의 바스락 거림, 해 질 녘 풀숲에 묻은 먼지, 멀리서 종소리를 끌고 오는 저녁 공기. 그 향이 방 안 깊숙이 스며들면,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마치 오래 묵힌 편지를 다시 펼쳐 보는 것처럼, 마음속 주름이 하나씩 펴진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릴 무렵, 거리의 속도도 달라진다.
여름 내 바쁘게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지고, 머그잔을 감싸 쥔 손끝에선 온기가 전해진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마저도 잔잔한 배경음악처럼 들린다. 가로수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은 부드러워지고, 그 사이로 사람들의 표정도 조금씩 풀린다.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칠 때, 잊고 있던 말들이 떠오른다.
전하지 못한 안부, 고맙다고 못 한 인사, 미안하다고 삼킨 순간들. 이 계절엔 그런 마음이 선명해진다. 그래서일까. 오랫동안 묵혀 둔 연락처를 눌러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짧은 “잘 지내?” 한마디에도 온기가 스며들 수 있는 때이니까.

해가 일찍 기울어 그림자가 길어지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그리고 여전히 품고 있는 건 무엇인지. 바람 사이로 지나가는 시간의 결이 손끝에 스칠 때, 마음속 서랍을 하나씩 열어 정리하고 싶어진다. 이 계절은 용서를 조금 덜 어렵게 만들고, 고백을 조금 덜 두렵게 한다.

저녁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순간,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멀리 보이는 노란 은행나무, 발끝에 뒹구는 갈색 나뭇잎, 어깨 위로 살며시 내려앉는 햇살. 이 계절은 곧 지나가겠지만, 그 안에 담긴 숨결과 장면들은 오래 남을 것이다.

올해, 당신이 놓치고 싶지 않은 가을은 어떤 모습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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