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를 안고, 숨을 쉬다
그날, 세상의 모든 색이 꺼졌다.
빛은 유리잔이 깨지듯 흩어졌고, 소리는 먼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숨이 목구멍에 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기둥이 툭, 부러져 나갔다. 그 자리에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견딜 수 없음이라는 감각.
그건 단순히 아픈 것이 아니었다. 물살이 갈라진 틈새로 스며들어 폐를 채우는 바닷물처럼, 아직 준비도 못 한 몸을 덮쳐온 파도였다. 겉은 평온해 보여도 속은 이미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영원히’라는 말에 무심했다. 그럼에도 몇 사람은 오래 머무를 거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신호 없이 빼앗는다. 전화기 너머로 날아온 한 문장. “미안하지만, 이제 연락하지 말아 줬으면 해.”
그 순간 발목부터 서늘한 물이 차올랐다. 숨결이 식고, 혀끝은 얼어붙었다. 며칠 동안 말 한마디 없이 지냈다. 부재라는 것은, 살 속에 박힌 보이지 않는 파편 같았다. 건드리지 않아도 은근히 쑤시고, 스치기만 해도 피를 흘리게 한다.
사랑이 식는 건 소리 없이 일어난다. 어느 날 문득, 온도가 달라져 있다. 웃으며 들어주던 이야기는 흘려듣고, 내가 고른 음식 위로 무심히 젓가락이 떨어진다. 손끝의 온기는 차갑고, 그 차가움은 설명이 필요 없는 대답이 된다. 그걸 아는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서서히 무너졌다. 모른 척하는 데도 끝이 있었다. 사랑이 닫히던 날, 눈물보다 먼저 치밀어 오른 건 분노였다. 왜 무너지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지, 왜 이 무게를 홀로 짊어져야 하는지, 물을 곳은 없었다.
혼자가 편하다는 말, 나도 믿었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 선택했을 때만 가능하다. 밀려난 끝에 남은 고독은 전혀 다르다. 밤이 깊을수록 집 안의 숨소리가 더 선명해지고, 가전의 작은 진동마저 멀게 느껴진다. 창밖 불빛이 하나둘 꺼질 때, 남아 있는 나를 바라보면 숨이 답답해진다. 고독은 어깨에 얹힌 돌처럼 옮길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마주하기 두려운 장면이 있다. 병실의 희고 얇은 이불 위에서 깜빡이는 산소마스크,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문만 바라보는 사람의 등, 웃음 잃은 아이의 공허한 눈. 그런 순간은 마음속에 금을 낸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그 연약함을 외면하는 일이 얼마나 잔인한지 깨닫게 한다. 그러나 끝까지 바라보는 일은 숨이 막힐 만큼 어렵다.
나는 오랫동안 ‘견딜 수 없음’을 피해 다녔다. 다가오면 돌아섰고, 아프면 눈을 감았다. 하지만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게는 딱딱하게 굳어 내 안에 남았다. 오래전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이 불쑥 들려왔을 때, 굳게 잠긴 문이 열렸다. 안에는 부서진 기억들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견딜 수 없다는 건, 아직 끝까지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걸.
버티게 하는 힘은 거창하지 않았다. 가볍게 건네는 안부, 한 모금의 따뜻한 차, 오래된 노래 한 소절. 작은 것들이 숨 쉴 틈을 만들고, 그 틈이 이어져 긴 호흡이 된다. 여전히 나는 많은 것을 견디지 못한다. 불시에 찾아오는 이별, 낯선 고독, 되돌릴 수 없는 후회. 그러나 안다. 그 모든 순간이 언젠가 지나온 길이 된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 그때를 떠올린다. 왜 그렇게 버거웠을까. 그러나 그 시절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견딜 수 없다고 믿었던 시간은 결국 표지판이 되었다. “여기까지 왔구나. 네가 건너온 길이 바로 이곳이구나.” 그 말을 들으면 마음이 조금 풀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젠가 또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와도, 그것마저 하나의 표지판이 될 거라고.
견딜 수 없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뿐이다. 그 배움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조금 더 깊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견딜 수 없는 하루를 견디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