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시간의 손이 남긴 것들

by Helia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다른 모양을 갖는다.
아무 일도 없던 듯 웃던 얼굴도, 한때 내 안에서 뜨겁게 뛰던 심장도, 오래된 집 담벼락의 그림자처럼 조금씩 옅어진다. 그러나 옅어진다는 말이 꼭 사라짐을 뜻하지는 않는다. 흐릿해진 색 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온기와 냄새가 있다.

봄이 다섯 번쯤 돌아온 뒤, 나는 그때를 생각했다. 첫 번째 봄은 너무 가까워서 숨이 막혔다. 두 번째 봄은 모른 척하려고 애썼다. 세 번째 봄에는 잊었다고 믿었고, 네 번째 봄에는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리고 다섯 번째 봄, 나는 마침내 인정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데려가지 않는다. 가져가는 것만큼 남겨두는 것이 있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오래전에 함께 걸었던 강변을 다시 찾은 적이 있다. 그날 강물은 유난히 느리게 흘렀다. 바람은 머리칼 끝을 스치고, 강둑 풀잎이 한꺼번에 고개를 흔들었다. 발밑의 흙길이 부드럽게 꺼지고, 신발 밑창에 흙냄새가 묻어났다. 그 길 위에서 나는 ‘그때’의 내 발걸음을 보았다. 옆에 있던 너의 그림자가 아직도 강물 위에 걸려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소리도 변한다. 네가 부르던 웃음소리는 더 이상 생생하지 않다. 대신 그것은 부드러운 울림으로 변해, 어느 날 불현듯 귀를 적신다. 카페에서 흘러나온 오래된 팝송, 장마철창문을 두드리던 빗방울, 버스 창가에 부딪히던 바람소리 속에서 나는 너를 다시 듣는다. 그때마다 내 심장은 예전처럼 크게 뛰지는 않지만, 잔잔한 물결이 번져 간다.

가을이 오면, 시간은 더욱 분명하게 말을 건넨다. 거리에 쌓이는 낙엽은 지난날의 편지를 닮았다. 한 장씩 발밑에서 부서질 때마다, 나는 하나의 계절을 떠나보낸다. 그러나 부서진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낙엽의 부서진 결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처럼, 기억은 새로운 모양으로 내 안에 남는다.

겨울은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버린다. 마치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해진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도 시간은 계속 흐른다. 창밖에 쌓인 눈은 하루가 지나면 얼어붙고, 다시 녹아 사라진다. 나는 그 변화를 바라보며, 우리도 그렇게 조금씩 다른 모양을 입었다는 걸 깨닫는다. 눈 속에 발자국이 남아 있듯, 너와 나의 자취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완전한 망각이 아니라, 다른 결로 재편되는 일이다. 날카롭던 기억은 모서리가 닳아 부드러워지고, 선명하던 색은 파스텔빛으로 옅어지지만, 그 옅음이 주는 평화가 있다.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과거에 묶여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네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할까 두려워서다. 대신 계절의 냄새와 색, 바람의 결 속에서 너를 꺼내 본다. 가끔은 그 기억이 나를 울리고, 가끔은 웃게 한다. 이 모든 감정이 시간의 손을 거쳐 나에게 돌아온 선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시간을 믿는다. 그것이 데려간 것과 남겨둔 것, 지운 것과 새겨놓은 것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다른 내가 되어 간다. 그리고 언젠가, 이 모든 날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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