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었어
가을빛이 깊어지고 있었다. 은행잎은 황금빛 비를 쏟아내고, 단풍잎은 바람에 실려 천천히 하늘을 맴돌았다. 스무 살이 된 옥화는 오랜만에 낯익은 골목을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된 기억이 발끝에 걸려와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가슴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그 집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담벼락의 기와가 조금 기울었고, 대문 위로 얽히던 담쟁이덩굴은 한층 더 짙게 자라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발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세월의 주름이 조금 더 깊어진 새엄마가 서 있었다. 순간, 옥화의 눈이 흔들렸다.
“왔구나…”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계절이 스쳐 지나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온갖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오래된 나무 냄새, 장독대에서 풍기는 된장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부엌에서 피어오르는 따끈한 국물 냄새. 새엄마는 말없이 상을 차리고 있었다.
“앉아. 시장할 거다.”
그 목소리는 예전보다 낮고 조용했다. 옥화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 그리고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반찬이 올랐다.
새엄마는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얻어먹은 밥 때문에, 네가 떠나고 나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어.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지. 그럴 만도 하지… 어린것한테 그렇게 매몰차게 굴었으니. 한 번은 꼭, 내가 한 밥을 먹이고 싶었어.”
그 말에 옥화의 손끝이 떨렸다. 뜨거운 국물 한 숟갈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오래전 묵혀둔 서운함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자, 새엄마는 부드럽게 웃었다.
“많이 컸다. 가는 길이니 든든히 먹고 가.”
그때, 부엌 문가에 서 있던 이복언니가 물었다.
“그때 그 애 만나러 가는 거지? 김진사 댁 막내… 누구더라? 순석이었던가?”
옥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잘 만나. 혹시 모르잖아. 그 애도 기다렸을지.”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묘하게 가벼웠다. 기차역까지 가는 길,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단풍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길 위로 깔리고, 코끝엔 익숙한 가을 냄새가 감돌았다. 옥화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혹시라도 그가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아니면… 잊었을까?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거긴 조용했다. 바람만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바위 곁의 풀잎을 흔들고 있었다. 옥화는 한참을 기다렸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해는 서서히 기울었다. 끝내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그래… 세월이 이렇게 흘렀으니, 그도 다른 길을 걸었겠지. 옥화는 바위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촉감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그 자리에 잠시 머물다, 그녀는 길을 돌았다.
기차역 플랫폼이 보이자, 마음 한편이 허전하게 내려앉았다. 역전 광장은 붉은 노을빛에 잠겨 있었고, 바람은 기차의 기적 소리와 함께 스쳐갔다. 옥화가 역전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옥화!”
낯익은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돌린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가 서 있었다. 군복 차림에, 단정히 다듬어진 머리. 조금은 성숙해졌지만, 어릴 적의 눈빛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숨이 가쁜지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지만, 표정은 환하게 빛났다.
순석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짧고 단호하게 한마디를 꺼냈다.
“보고 싶었어.”
그 말은 바람을 타고 옥화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모든 기다림과 그리움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옥화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도 웃으며 답했다.
“나도.”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오래전 헤어진 아이가 아니라, 서로의 세월을 견뎌온 한 사람으로서 마주 섰다. 주변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둘만의 것으로 고요히 감싸고 있었다.
기차의 기적 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어떤 소리도, 그 한마디보다 깊게 남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