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장|소설가

문장으로 숨 쉬는 사람

by Helia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5번 D단조 Op.47


새벽 세 시, 책상 위 커피는 이미 미지근했고, 창밖 어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날 밤,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려 원고를 다섯 번 찢었다. 종이 귀퉁이에는 손톱자국이 남았고, 미완의 문장은 방향 잃은 새처럼 허공을 맴돌았다. 이 시간, 세상은 잠들었지만, 소설가는 깨어 있었다. 종이와 펜 사이에서 그는 숨을 쉬었다.

작가의 하루는 요란하지 않다. 커피포트에서 피어오르는 김, 골목을 스치는 고양이의 발자국, 바람결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 그 사소한 것들이 이야기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싹이 터 꽃이 되기까지는 무수한 지우기와 다시 쓰기가 이어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이 있고, 그 틈은 고독과 기다림으로 메워진다.

이 직업은 축복이자 짐이다. 축복인 까닭은 세상의 결을 누구보다 세밀하게 더듬을 수 있어서이고, 짐인 이유는 그 결이 지나치게 선명해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눈은 지나가는 그림자도 놓치지 않는다. 버스 창 너머 스치는 풍경 속에서도, 카페 구석의 숨죽인 대화 속에서도 이야기를 듣는다. 그 조각들은 마음속 깊은 서랍에 쌓였다가, 어느 날 인물의 눈빛이나 대사로 다시 숨을 쉰다.

소설을 쓴다는 건 두 개의 시계 사이를 오가는 일이다. 현실의 시계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만, 소설 속 시계는 거꾸로도, 멈춘 채로도, 때로는 한없이 늘어진 채로도 움직인다. 그 줄타기는 위태롭지만, 불안은 오히려 이야기를 앞으로 밀어낸다.

때로 나는 “나”라는 화자를 불러낸다. 그 순간 나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게 된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변한다. 마치 처음 걷는 거리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또렷하다. 그 낯섦이 문장을 움직인다.

창작의 고독은 필수다. 사람들과의 대화가 재료를 준다면, 혼자는 그것을 숙성시키는 통조림 같은 시간이다. 방 안 공기는 묵직하고, 책상 위에는 미완의 책들이 층을 이루고 있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 잉크 특유의 매캐한 냄새, 오래 앉아 느껴지는 의자의 단단함까지 — 모든 것이 글의 일부다.

글쓰기는 바다 항해와 닮았다. 첫 문장은 항구에서 떠나는 순간이고, 중간은 폭풍 속 한가운데다. 배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지만, 수평선 너머의 미지가 나를 붙잡는다. 마지막 마침표는 귀향이지만, 그 귀향은 떠나기 전의 내가 아닌, 변한 나를 맞이한다.

소설가는 허구를 만들지만, 그 속에 반드시 진실을 심는다. 독자는 그 진실을 느끼기에 허구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관찰한다. 시장 골목에서 스치는 손길, 비 오는 날 횡단보도에서 서로를 외면하는 연인, 지하철의 알 수 없는 한숨. 그 모든 장면은 언젠가 문장이 될 때까지 나를 기다린다.

이 길에서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다. 때로 내가 쓰는 이 한 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불쑥 치고 올라온다. 하지만 그 의심을 안고도 끝까지 쓰는 법을 배운 것이, 소설가로 산 세월이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완성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일은 아이를 세상에 보내는 일과 같다. 독자가 어떻게 읽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 이야기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내 문장에서 자기 삶을 발견했다고 말할 때, 그 모든 밤과 고독이 빛으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