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장| 3년

사계절을 건넌 사랑의 기록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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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 녹턴 Op.9 No.2


3년을 함께한 사람이 있었다.
손을 맞잡으면 세상의 끝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눈이 마주치면 바람도 숨을 죽였다. 매일이 기념일처럼 반짝였고, 작은 약속에도 ‘영원’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그 영원은 봄날 꽃잎처럼 화려했으나, 바람 한 번에 흩날렸다.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첫 해는 빛 속에 잠겨 있었다.
처음 마주 앉았던 카페, 오래 쓰다듬은 나무 의자, 창밖으로 스며든 오후의 빛결. 서툰 대화 속에서도 서로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는 새벽이슬처럼 맑았고, 내가 웃으면 그는 더 크게 웃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시간이 잠시 멈추는 듯했다.

두 번째 해,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를 배웠다.
그의 버릇, 나의 습관, 다투는 방식, 화해의 온도. 처음엔 모든 것이 특별했지만, 익숙함 속에서 작은 흠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랑은 견고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 대신 그의 어깨 아래로 몸을 파묻었고, 하루 끝에는 서로의 목소리로 마음을 달랬다. 침묵조차 우리를 가르지 못했다.

세 번째 해, 계절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변했다.
그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반짝임은 사라졌고, 나 역시 그 빛을 잃었다. 하루의 이야기는 짧은 안부와 피곤하다는 말로 끝났다. 함께 있어도 각자의 화면을 바라보았고, 같은 공간에 앉아 있어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멀어졌다. 애써 웃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 전의 온기를 잃고 있었다.

연인이라면 지켜야 할 약속들은,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바람 앞 촛불처럼 쉽게 꺼졌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깊어진다 했던가.
혹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걸까.
같이 있음에도 공허가 가슴을 파고드는 건, 오롯이 나만의 탓일까.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던 마음은 계절이 바뀌듯 옅어져 갔다.

헤어짐은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보며 전해야 하는 법인데
우리는 차가운 전파를 타고 건너온 목소리로 끝을 말했다.
전화기 너머, 숨소리마저 낯설게 들리던 순간이었다.

그 말 뒤엔 고요만이 남았다.
우린 싸우지 않았고,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았다. 단지 서로의 손을 놓을 때가 되었음을, 더는 함께 걸을 수 없음을 동시에 알았다.
마지막 날, 카페 창가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유리창 너머 겨울빛이 번졌지만, 그 빛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컵을 내려놓는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내 손끝은 얼음처럼 식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3년은 끝났다.

헤어진 뒤, 3년은 전혀 다른 무게를 가졌다.
처음엔 허무뿐이었다. 영원을 믿었기에, 모든 시간이 배신처럼 느껴졌다. 사진은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고, 선물로 받은 책은 표지를 마주하지 않으려 애썼다. 익숙하던 노래조차 배경이 아닌 상처로 들렸다. 걷다가 불쑥 떠오르는 장면들은 가슴을 날카롭게 스쳤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아마도 봄이었다. 가벼운 바람이 불었고, 하늘은 깨끗했다. 문득 깨달았다. 3년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안에는 웃음과 눈물, 다정함과 서툼, 성장과 상처가 고루 섞여 있었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시간 속 나는 분명 살아 있었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그 순간이 거짓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주고받았던 말, 바라보던 눈빛, 함께 걸었던 밤길의 냄새는 진짜였다. 3년 동안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상처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도 익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시간이었다.

이제 3년은 내 안에서 다른 얼굴로 남아 있다.
날카로웠던 기억의 모서리는 닳아 부드러운 곡선이 되었고, 그 위에 처음의 설렘과 마지막의 침묵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나는 그 길 위를 천천히 걸으며, 한때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되새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음을, 조금 더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3년은 짧지 않았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건너고, 머물렀다가, 결국은 떠났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데려왔다. 언젠가 다른 계절에, 다른 사람과 새로운 시간을 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다를 것이다. 3년이 내게 남긴 것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영원하자던 약속이 무색하게 끝났지만, 그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다고. 그 순간의 우리는 진심이었다고. 그리고 그 진심이 나를 만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