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밤

도망이자 시작, 새벽의 얼굴

by Helia

새벽 세 시, 창문 밖은 여전히 먹빛인데 내 안은 이미 환하다. 휴대폰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창을 열면, 싸늘한 공기가 밀려들어와 온몸을 움찔하게 한다. 차가운 숨결은 피곤을 잠시 잊게 하고, 정신을 또렷하게 세운다. 이 낯선 역설이 바로 새벽 밤의 얼굴이다.

가로등 불빛만 겨우 스며든 거리는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정적에 잠겨 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작은 소리들이 어둠 속에서 살아난다. 시곗바늘이 분을 새기는 소리, 냉장고가 내뱉는 낮은 숨결,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택시의 바퀴 울림. 낮에는 소음 속에 묻혀 사라지던 것들이, 이 시간에는 다정한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나는 새벽 밤을 오래된 고해성사처럼 느낀다. 낮에는 미뤄두었던 속마음들이 이 시간에는 줄지어 나타난다. 못다 한 말, 눌러둔 후회, 놓쳐버린 기회.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서성이다가 내 곁에 앉는다. 낮 같았으면 차갑게 외면했을 얼굴들을, 새벽은 오히려 부드럽게 안아낸다.

어떤 새벽은 쓸쓸하다. 방 안은 적막하고, 창밖도 비어 있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이 고요가야말로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꾸밈없는 얼굴, 가면 벗은 마음. 아무도 보지 않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나는 가장 진실해진다.

어릴 적 기억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시골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바라본 까만 하늘, 손만 뻗으면 잡힐 듯 가까웠던 별빛. 그 별 아래서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약속을 희미하게 지웠다. 새벽은 잊힌 다짐들을 다시 꺼내와 조용히 불을 붙인다. 먼지 낀 노트 속 구절처럼, 가슴 한쪽이 서서히 따뜻해진다.

새벽의 공기는 단순히 차가운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씻어낸 듯 투명하다. 심장을 단단히 움켜쥐고 눈을 뜨게 한다. 야근을 마치고 막차에서 내려 역을 나서던 날, 공기가 폐 속으로 파고들자 기묘하게도 몸이 가벼워졌다. 묵은 피로가 씻겨 내려가듯, 새로 시작되는 기분. 새벽이 내게 주는 건 바로 이런 ‘새로운 숨’이다.

사람들은 흔히 새벽과 밤을 갈라놓지만, 내겐 같은 얼굴의 다른 표정일 뿐이다. 밤이 길고 무거운 고독이라면, 새벽은 그 끝에 번지는 희망이다. 밤이 긴 한숨이라면, 새벽은 그 끝에서 번지는 짧은 미소다. 서로가 서로를 지우지 않고, 함께 어깨를 기댄 채 완성된다.

이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우연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이, 그림을 그리는 이, 악보를 적는 이. 그들의 손끝에서 새벽은 자주 태어난다. 꿈과 현실이 겹쳐지는 경계에서만 길어 올릴 수 있는 빛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 시간에 글을 적는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창가에 앉아 내 안의 목소리를 옮겨 적는다. 세상과 나, 둘만 남은 대화처럼.

현실적인 풍경도 새벽을 특별하게 만든다. 간호복을 입은 채 병원에서 퇴근하는 사람, 첫차를 기다리는 노동자, 택배 상자를 실은 트럭, 야식 배달 오토바이. 그들의 모습은 지친 듯하면서도 묘하게 자유롭다. ‘나만 깨어 있는 게 아니구나’라는 연대감은 낯선 위로가 된다.

시간은 흘러 하늘은 변한다. 처음엔 먹빛이었으나, 이윽고 파랑이 스며들고, 붉은 기운이 번진다. 어둠은 언제나 완강하지만 결국은 빛을 낳고 물러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은 더욱 선명하다. 그래서 나는 밤을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품 안에서 빛을 기다린다.

짧은 문장이 속삭인다.
“새벽은 도망이자 시작이다.”

나는 도망치듯 새벽을 붙잡는다. 그러나 이 시간은 동시에 새로운 길을 연다. 어제의 무게도, 내일의 불안도 잠시 내려놓게 만든다. 비워진 자리엔 다시 채울 여백이 생긴다.

많은 이들이 내일을 바라보며 잠들 때, 나는 오늘을 곱씹으며 새벽을 맞는다. 같은 시간 속에서도 누구는 끝을, 누구는 시작을 산다. 그 낯선 대비가 새벽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돌아보면 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새벽이 있었다. 처음 원고를 마친 날도, 사랑을 끝내야 했던 밤도, 홀로 울던 시간도, 다시 마음을 다잡던 순간도 모두 새벽의 품 안에 있었다. 새벽은 늘 조용히 지켜보던 관객이자, 때로는 무대 뒤편에서 등을 밀어준 연출가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은 내 앞에 와 있다. 창문을 열고 차가운 숨결을 깊이 들이마신다. 심장이 다시 크게 뛴다. 아직 쓰지 못한 문장,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 아직 도착하지 못한 길. 그 모든 것이 나를 기다린다.

새벽 밤은 끝이 아니다. 가장 선명한 시작이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어둠의 끝이겠지만, 나에겐 또 하나의 빛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고요 속에서 내가 가장 솔직하게 나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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