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사랑하지 않아

사랑은 끝에서도 우리를 가르친다

by Helia

나는 그날, 가장 잔인하면서도 가장 솔직한 말을 들었다. “널 사랑하지 않아.” 목소리는 흔들림조차 없었고, 오히려 담담했다. 차라리 울부짖거나 흔들리는 기색이 있었다면 아직 불씨가 남아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차분함은 더 깊은 절망을 전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끝나 있던 사랑을, 그제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별은 번개처럼 번쩍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균열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린 잔해처럼 다가온다. 웃음의 박자가 엇나가고, 대화의 간격에 침묵이 늘어나며, 손끝의 온기가 낯설어질 때 비로소 알게 된다. 관계는 천천히 마모되다 마침내,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단정한 문장으로 완성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미움과는 다르다. 미움은 여전히 감정을 태운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음은 텅 빈 방과 같다.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발자국, 다 식은 커피잔, 아무도 켜지 않는 불빛. 그것은 소리 없는 종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냉혹하다.

나는 한때 그 말이 잔인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또한 마지막 남은 정직이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 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서로를 배신하는 일이었음을 뒤늦게 배웠다. 결국 차갑게 잘라내는 것이 최소한의 온정이자 마지막 예의였다.

사랑이 흘러내리는 과정은 모래시계와 닮았다. 처음엔 반짝이며 쏟아지지만,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낸다. 아무리 거꾸로 돌려도 이미 흘러내린 모래는 제자리에 돌아가지 못한다. 사랑도 그렇다. 노력으로 다시 불 붙이려 해도, 한 번 꺼진 불꽃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애씀은 마지막 남은 불씨마저 꺼뜨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내 잡으려 한다. 사랑은 노력으로 유지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애써 붙잡는 힘이 아니라, 서로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를 맞추며 흘러가는 흐름일 때만 이어진다. 한쪽이 앞서거나 늦어지면 균형은 무너지고, 결국 흐름은 멈춘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함께 앉아 있던 카페에서 그의 눈빛은 창밖만 향했고, 내 말은 허공에 흩날렸다. 커피 향은 진했지만 대화는 옅었다. 그 순간 이미 우리 사이의 모래시계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사랑은 미움이 아니라 공허로 끝난다는 것을.

이별의 고백을 들은 날, 내 안에는 분노도 눈물도 없었다. 오히려 낯선 평온이 자리했다. 오래전부터 예감해 온 결말이었으니까. 다만 그 말을 내가 꺼낼 용기가 없었을 뿐. 그래서 상대가 대신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 속마음을 대신 읽어내 대본처럼 읊어준 것 같았다.

어반자카파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담담한 목소리에 오래 붙잡혔다. 절규도,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 다 타버리고 남은 잿더미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반복되는 한 문장. “널 사랑하지 않아.” 오히려 그 차분함이 나를 무너뜨렸다. 눈물 대신 깊은 냉기가 가슴을 덮었다.

그 노래는 한동안 내 플레이리스트 맨 앞에 있었다. 반복해서 들을수록, 그것은 더 이상 내 상처를 파고드는 칼날이 아니라, 현실을 덤덤히 낭독해 주는 목소리로 다가왔다. “이제는 놓아야 한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끝이 있다. 때로는 내가 그 말을 하고, 때로는 상대가 먼저 입을 연다. 그래서 이 노래가 많은 사람의 심장을 건드린다. 시작의 설렘은 희미해지지만, 끝의 고백은 오래도록 남는다. 우리는 그 순간을 통해 배운다. 사랑은 끝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을.

한때 나는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또다시 마음은 누군가를 향했다. 인간은 그렇게 연약하면서도 강하다. 상처를 두려워하면서도, 또다시 시작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이별의 고백은 절망이 아니라 다른 계절로 나아가기 위한 출구다. 오래된 집을 떠나야 새집을 얻듯, 낡은 사랑을 비워야 새로운 사랑이 들어온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같은 고백 앞에 서 있는가. 만약 누군가 담담히 말했다면,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그 말은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걷던 길의 끝을 알려주는 신호일뿐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붙잡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당신 자신을 위해 그 자리를 비워야 한다. 그래야 다른 계절이 들어올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그 노래를 틀어놓는다. 예전처럼 눈물이 터지진 않는다. 대신 잔잔한 평온이 흐른다. 그 노래는 나를 무너뜨린 곡이면서 동시에 다시 일으켜 세운 곡이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종말은 또 다른 시작을 향한 문이다. 공허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짜 자유로워진다.

오늘도 노래는 담담히 흘러간다. “널 사랑하지 않아.” 이제 그 말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슬픔을 지나 자유와 위로로 변해 내 안에 스며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