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

사라짐이 건네는 첫 번째 인사

by Helia

뜨겁던 바람이 문득 서늘해지고, 귀뚜라미 울음이 밤공기를 파고드는 순간, 나는 여름의 끝자락에 서 있음을 안다. 아직 햇볕은 따갑지만, 그 속에 묘한 한기가 섞인다. 계절은 이렇게 기척을 남기며 조용히 옮겨간다.

여름은 늘 과장된 열기로 시작한다. 태양은 정수리를 내리꽂고, 아스팔트는 불판처럼 달궈진다. 숨이 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사람들은 그 계절을 원망하면서도, 아이스크림 하나에 웃고, 선풍기 바람 앞에서 녹아내리며 버텼다. 그러나 끝자락에 서면 마음은 달라진다. 짜증 나던 열기마저, 이젠 곧 사라질 풍경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아련하다.

나는 여름의 끝을 공기에서 가장 먼저 느낀다. 습기가 가라앉고 바람이 바뀐다. 뜨겁기만 하던 바람은 어느 순간, 살결을 스치며 온도를 낮춘다. 낮에는 여전히 땀이 흐르지만, 밤에는 창문을 열면 시원한 숨결이 스며든다. 잠결에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는 마치 계절이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같다.

햇살도 달라진다. 한낮에는 여전히 강렬하지만, 오후 늦게 들어오는 빛은 부드럽게 기울어 있다. 책상 위에 번지는 그림자는 길어지고, 강가에 서면 햇살이 물 위에 금빛 가루처럼 흩어진다. 여름은 떠나기 직전, 화려한 옷을 벗고 은은한 색감으로 자신을 마무리한다.

어릴 적 여름방학의 끝도 늘 이랬다. 한창 놀다 보면 어느새 8월이 끝나가고, 밀린 숙제가 눈앞에 산처럼 쌓였다. 공책에 연필을 눌러 끼적이며 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놀이터에서 뛰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 습한 저녁 공기, 달빛 아래서 부채질하며 듣던 어른들의 이야기. 모두 여름이 남긴 선물이었다. 개학 전날 새 연필을 깎아 필통에 넣으며, 나는 알았다. 여름은 늘 끝나야만 비로소 선명해진다는 것을.

성인이 된 지금도 다르지 않다. 퇴근길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서서히 색을 바꾼다. 저녁 하늘은 더 붉게 타오르고, 공기는 여전히 덥지만 한결 가볍다. 낡은 신발에 밴 땀 냄새조차 묘하게 정겹다. 하루를 버티며 살아낸 흔적 같아서. 여름의 끝자락은 그렇게 우리의 삶을 다독인다.

이 계절이 끝나갈 즈음, 나는 늘 바다를 떠올린다. 모래 위 맨발로 남긴 발자국, 파도에 닿자마자 지워지는 쓸쓸함, 젖은 머리칼에 스며 있던 짠내. 바다는 여름을 가장 잘 담아낸 풍경이다. 그러나 바닷가에 서 있으면 알 수 있다. 아무리 요란했던 파도도, 결국은 고요로 돌아간다는 것을. 여름도 마찬가지다. 끝자락에서야 온전히 고요해진다.

여름은 오래된 영화 같다. 처음엔 요란한 음악과 강렬한 장면으로 몰아치지만, 마지막은 잔잔하게 페이드아웃된다. 화면은 사라져도, 여운은 길게 남는다. 여름의 끝은 바로 그 엔딩 크레디트와 닮아 있다.

그 순간, 우리는 되묻게 된다. 뜨거운 계절을 지나며 나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가. 여름은 한때 청춘의 은유였다. 불타듯 뜨겁고, 무모할 만큼 솔직했으며, 쉽게 지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래서 더 선명히 각인된다. 청춘이 저물 때 느끼는 허전함처럼, 여름이 끝날 때도 마음 한쪽이 비어 간다.

그 허전함은 동시에 희망이기도 하다. 여름이 저물면 가을이 온다. 하늘은 더 높아지고, 바람은 더 깊어진다. 계절은 늘 이어진다. 끝은 시작으로 변하고, 사라짐은 새로운 도래가 된다. 여름의 끝자락이 주는 쓸쓸한 온기 속에서 우리는 다음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한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여름은 끝에서야 진짜 아름다워진다고. 땀에 젖어 투덜거리던 한낮보다, 서늘한 기운이 스며든 저녁 무렵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귀뚜라미 소리, 붉게 타는 하늘, 느리게 흘러가는 버스 창밖 풍경. 그것들이야말로 여름이 내게 남겨준 가장 선명한 장면들이다.

그래서 여름의 끝자락에 서면, 나는 걸음을 늦춘다. 사소한 풍경조차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뜬다. 계절은 언제나 ‘끝’을 통해 가장 진솔한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름은 떠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내 안에 기억으로 남아, 언젠가 또 다른 계절을 불러낸다. 모든 끝은 결국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름의 끝자락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 계절이 건네는 첫 번째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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