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기록이 더 진짜다
노트를 사는 순간은 늘 설렌다. 하얀 종이를 펼치면 마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기분이 든다. ‘이번엔 제대로 써야지’ 하고 펜을 쥐지만, 몇 장을 채우기도 전에 글은 멈춘다. 첫 장에만 날짜가 남고, 책상 위에는 미완성의 노트가 쌓인다. 몇 날 며칠을 건너뛰다 보면 어느새 몇 달째 빈 채로 덮여 있다.
쓰다 만 페이지를 다시 열면 민망하다. 반쯤 채운 글씨가 어색하고, 이어가려니 뭔가 끊어진 느낌이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보면 그 속에도 하루가 살아 있다. 짧게 남은 문장 하나, 삐뚤빼뚤한 글씨 하나. 그 사소한 흔적에도 그날의 공기와 기분이 스며 있다. 쓰다 만 페이지조차도 나의 삶을 증명한다. 완벽히 채우지 않아도, 한 줄이 남았다면 이미 의미 있는 기록이다.
사실 일기를 쓰는 건 나와 마주 앉는 일이다. 하루 동안 쌓인 감정을 거짓 없이 꺼내야 한다. 그런데 솔직함은 가장 어려운 덕목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글인데도 괜히 꾸며내고 싶고, 감추고 싶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기록한다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차라리 쓰지 않는 편이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가끔 남긴 기록은 묘하게 마음을 가볍게 한다. “오늘은 그냥 힘들다.”라는 단 한 줄에도 위로가 있다. 적어도 그날을 살아냈다는 증거가 남았으니까. 일기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작은 표식이다. 화려할 필요도, 길 필요도 없다. 밀려도 괜찮다. 멈춰도 괜찮다. 다시 쓰면 된다.
책상 위에 덮여 있는 노트, 굴러다니는 펜 한 자루, 첫 장만 빼곡히 채운 후 텅 빈 페이지들. 누구나 공감할 만한 풍경이다. 다짐과 실패가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 그 속에서 느끼는 자책과 체념. 그러나 그 또한 우리의 삶이다. 중요한 건 끝까지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도했다는 흔적에 있다.
우리는 기록조차 완벽히 채우고 싶어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빠짐없이 이어져야만 가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삶은 본래 빈틈투성이 아닌가. 비워진 페이지가 있다 해서 그 하루가 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빈칸이 있었기에 다음 장이 열리고, 또 다른 기록이 가능해진다. 삶은 비어 있음과 채워짐이 어우러져 완성된다.
일기를 쓴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적는 순간, 무질서하던 생각이 줄을 맞추고, 복잡하던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하루는 단순한 지나감이 아니라 의미로 남는다. 기록은 대화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마주 서서 서로에게 안부를 건네는 시간이다.
나는 여전히 일기를 잘 쓰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자책하지 않는다. 몇 줄만 적어도 좋고, 며칠을 건너뛰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다시 펜을 드는 용기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마주하려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소중하다. 언젠가 시간이 더 흘러 오래된 노트를 펼쳤을 때, 빼곡히 채워진 글이 아니어도 듬성듬성 남은 단어들 속에서 분명 웃을 수 있으리라. “아, 이때는 이런 마음이었구나.” 하고.
결국 삶도 마찬가지다. 완벽히 채워지지 않아도 괜찮다. 삐뚤빼뚤한 글씨, 멈춘 페이지, 밀린 날짜. 그 모든 불완전함 속에 내가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있다. 오히려 불완전한 기록이 더 진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노트를 펼친다. 펜을 잡고, 날짜를 적는다. 한 줄이든 두 줄이든,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