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별빛처럼 스쳐간 궤적

by Helia

사람을 만난다는 건, 계절을 건너는 일과 닮아 있다. 봄처럼 불쑥 찾아와 꽃잎을 흩날리며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고, 여름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가 어느새 증발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가을이면 묵직한 향처럼 스며드는 이가 있고, 겨울처럼 고요히 곁에 머무는 이도 있다. 그 모든 만남은 계절의 얼굴을 한 인연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얼굴들을 스쳐왔다. 어떤 만남은 바람처럼 가볍게 지나가고, 어떤 만남은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자리를 잡는다. 오래 남았다고 꼭 특별한 것은 아니고, 짧다고 해서 하찮은 것도 아니다. 순간에 깃든 진심이 그 무게를 결정한다. 한순간 빛났던 미소 하나가 수년의 기억보다 오래 마음을 지키는 경우도 있다.

어릴 적, 골목을 함께 누비던 친구가 있었다. 여름밤 별빛 아래에서 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던 아이. 사소한 다툼에도 금세 화해하며 다시 웃었던 얼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시절의 웃음이 없었다면 내 어린 날은 더 허전했을 것이다. 그 만남은 그때의 계절이 허락한 선물이었다.

또 다른 만남은 불씨처럼 스쳐갔다. 몇 마디 나눈 대화, 짧은 동행. 그러나 그 하루가 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겼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이 남긴 빛은 여전히 꺼지지 않는다. 길게 이어지지 않아도 충분히 귀했던 흔적.

때로는 오랜 인연도 있다. 오래 곁에 있으면서도 특별히 각인되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짧았어도 오래 남는 사람이 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건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순간의 밀도에 달려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은 그 밀도의 총합으로 빚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난다.” 그 말은 위로 같기도 하고 체념 같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인연을 붙잡을 힘이 없다. 떠날 사람은 결국 떠나고, 머물 사람은 이유 없이 남는다. 억지로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주문처럼 쓰인다. 그러나 그 말속엔 진실이 숨어 있다. 억지로 쥐려던 손을 놓아야, 새로이 다가오는 얼굴을 맞이할 수 있다.

나도 후회한 적이 많다. 왜 붙잡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흘려보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꽃이 제철을 기다려야 피어나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맞는 시절이 있다. 철이 어긋나면 꽃봉오리는 피지도 못한 채 스러진다.

어떤 이는 별빛에 비유된다. 제각기 다른 궤도를 돌며 흘러가다가, 잠시 같은 하늘에서 빛을 교차한다. 이후에는 각자의 하늘로 흩어지지만, 그 순간 바라본 빛은 오래 기억 속에 남는다. 누군가는 다시 마주할 수 있고, 누군가는 영영 스쳐 지나간다. 중요한 건 그때 우리가 그 빛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삶을 돌아보면, 만남과 이별은 하나의 거대한 퍼즐을 완성해 가는 과정 같다. 퍼즐 조각이 전부 모이지 않아도 풍경은 나름의 의미를 띠게 된다. 우리가 모든 조각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이미 손에 쥔 조각 하나하나가 삶을 특별하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다. 언젠가는 헤어질 테고,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설렌다. 짧은 순간이더라도 내 마음을 흔들고, 오래 잊지 못할 장면을 남기기 때문이다. 인연의 유효기간을 미리 알 수 없으니 더 간절히 붙들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만이 인연은 아니다. 한 권의 책, 우연히 흘러나온 노래, 스쳐 지나간 풍경조차도 나를 바꾼다.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온 작은 빛이 내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우리가 계절을 건너며 만나는 건 결국 사람만이 아니라 수많은 표정의 세상이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 지나간 흔적을 원망하기보다 감사하고, 다가오는 얼굴을 주저하기보다 기꺼이 맞이하는 것.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더 귀하게 대하는 것. 언젠가 떠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믿는다. 사라진 듯한 인연이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름이 바뀌고, 얼굴이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져도 결국 같은 울림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시간이 다시 길을 내준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길 위에서 만난다. 그리고 헤어진다. 어떤 만남은 봄처럼 짧고, 어떤 만남은 겨울처럼 길다. 다시 만날 수도 있고, 영영 스쳐갈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모든 만남과 이별이 내 삶을 빛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결국 삶을 지탱하는 건 그 흔적들이다. 계절이 주고받은 인연, 순간에 머물다 간 얼굴들. 그 모든 것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만남을 하나의 이름으로 불러본다.

시절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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