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서약
“이번엔 네가 악몽 속에서 살아남길 빌어.”
하랑의 목소리는 차갑고 부드러웠다. 칼끝에 핀 붉은 꽃잎 같았다.
그녀의 손이 내 가슴 위를 누르는 순간, 심장이 폭발하듯 뛰었다.
그 고동은 단순한 박동이 아니었다. 오래된 북소리처럼, 전생의 혼례날로 나를 끌어당겼다.
붉은 천 위, 군중의 환호와 축원의 북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단칼에 끊어버린, 하랑의 칼끝.
피가 흩뿌려지고, 내 시야는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나는 쓰러지면서도,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울음을 보았다.
칼을 쥔 손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으나, 그 떨림 깊숙이엔 놓지 못한 사랑이 숨어 있었다.
그 기억이 지금, 현생의 공기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랑…”
나는 그 이름을 불렀다.
전생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부른 이름.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잔혹하게 미소 지었다.
“또 그 이름이네.”
그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전생에서도 네 마지막 말은 내 이름이었어. 사랑이라 믿고 싶었겠지. 하지만 내게 그건 저주였다. 부모를 잃고, 모든 걸 잃은 내게 네 목소리는 심장을 찢는 칼날이었어.”
그녀의 말이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 팠다.
나는 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날 널 원망하지 않았어. 죽음보다 무거웠던 건 너 고통을 바라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또다시 반복한다면, 넌 네 자신을 무너뜨리는 거야.”
하랑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간, 바닥에 흩어진 샹들리에 파편들이 떨리며 붉은빛을 토해냈다.
투명한 조각들은 서로를 향해 모여들었고, 곧 불길 같은 문양을 그렸다.
원. 칼. 이름.
전생의 서약이 현생에까지 살아 돌아온 것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혼례 전날, 그녀와 함께 피를 섞어 찍어냈던 혈서의 문양.
사랑이자 굴레, 그리고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 저주.
“보여?” 하랑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우리의 인연은 복수로도, 사랑으로도 끝나지 않아. 결국 이번 생에서도 넌 내 칼끝에 쓰러질 거야.”
나는 파편 위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손끝이 베이자 피가 흘러내렸고, 붉은 액체가 문양에 스며들자 불길은 더욱 타올랐다.
순간, 공기 속에 전생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내 비명과, 그녀의 울음.
칼이 심장을 꿰뚫는 고통보다 더 날카로운 건, 그녀가 흘리던 눈물이었다.
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하랑, 네가 날 죽였을 때조차 난 널 원망하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야. 넌 날 베어도, 우리를 끊을 수는 없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술이 열렸으나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젖히며 웃음을 뱉었다.
“이제 보니, 네가 참 잔인하구나. 사랑을 말하면서, 나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게 가두다니.”
그 순간이었다.
쿵.
부서진 파편 위를 밟는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건, 하얀 가면을 쓴 사내였다.
그의 망토가 바람에 흔들리자, 공기마저 갈라졌다.
“그만.”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폐 속까지 파고들었다.
하랑의 몸이 굳었다.
나는 눈을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피 냄새 속에서 오래 숨었던 그림자가 형체를 입은 듯했다.
하랑이 이를 악물었다.
“네가 감히… 이곳에.”
사내는 고개를 젖혔다.
“전생의 원한을 다시 꺼내는 건 또 다른 피를 부를 뿐이다. 복수의 끝은 공허일 뿐.”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오래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는 증인이자, 또 다른 서약의 주인이다.’
하랑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어?”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둘만의 서약이라 믿었겠지. 하지만 피로 새긴 문양은 처음부터 셋의 이름을 품고 있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하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거짓말… 설마….”
사내는 손을 들어 바닥의 문양을 가리켰다.
붉게 번지는 빛 속에서 세 번째 이름이 떠올랐다.
그건 내 이름도, 하랑의 이름도 아니었다.
낯설면서도, 오래전부터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이름.
하랑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너… 네가….”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래. 너희의 사랑과 원한, 그 모든 걸 지켜보며 어둠 속에서 기다려왔다. 이번 생은 내 차례다.”
붉은 불길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문양이 세 사람의 이름을 뒤엉켜 불태웠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리고 귓가에, 내가 아닌 내 목소리가 울렸다.
“현조, 이번엔 네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