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그림자의 주인
불길은 한꺼번에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 심장 근처에서 다시 토해냈다.
삼각으로 그려진 붉은 문양이 바닥 위에 기침처럼 일렁였고, 파편마다 불꽃의 혀가 짧게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뜨겁다. 그러나 기이하게 차갑다. 오래 묵힌 쇠비린내가 코끝을 쓸고 지나간다.
세 번째 이름이 떠올랐을 때, 내 안에서 오래된 자물쇠 하나가 덜컥 풀렸다.
낯선데도 알겠다. 모르는 얼굴인데도 기억난다.
마치 꿈에서 열 번쯤 지나온 교차로를 낮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익숙한 낯섦.
가면을 벗은 사내가 나를 보았다. 그 눈은 깊은 우물 같아서, 들여다보려는 순간마다 내 그림자가 물결에 일그러졌다.
“현조.”
한 낱말이 조용히 불렸다.
내 이름에 불씨가 붙었다. 소리 하나로 심장에 불이 옮았다.
하랑이 칼을 세웠다. 칼등에 묻은 어둠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물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을 베는 종이처럼 얇았지만, 가장자리에는 피가 말라붙은 흔적이 있었다. 오래 울어본 사람의 목소리다.
나는 그 떨림을 들었다. 들리는 쪽이 더 고통스러웠다.
“전생에도 네 마지막 말은 내 이름이었다지.”
가면의 사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엔 네 차례다. 네가 끝내려던 것을 내가 시작한다.”
그 말은 선언이라기보다 판결문 같았다.
하랑이 어깨를 굳혔다. 눈동자 속 불씨들이 서로를 긁어 불을 키웠다.
“네가 증인이었어? 아니, 너도 함께 맹세했지. 우리 몰래 피를 섞어 넣은 자.”
가면의 사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증인은 언제나 두 번째 칼이다. 첫 번째 칼이 흔들릴 때, 마침내 제 일을 한다.”
삼각 문양이 박동했다. 불길의 리듬이 심장과 겹쳤다.
쿵—쉬잇—쿵—쉬잇.
피는 음악이었고, 음악은 족쇄였다.
나는 그 리듬에 발목이 잡혀 끌려가면서도, 제 발로 걸음을 옮기는 착각을 했다.
그때, 문양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아니라, 물이 역류하듯 기억이 흘렀다.
—혼례 전날, 붉은 천 위에서.
큰 북의 가죽이 비에 젖은 듯 눅눅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축원을 외치며 북을 쳤고, 북소리는 곧 심장과 착각될 만큼 가까웠다.
나는 하랑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칼을 잡을 때와 다른 온도였다.
“다음 생에도.”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을 가볍게 베어 피를 찍었다.
그 순간, 등 뒤 어둠에서 아주 미세한 흙냄새가 섞여 들었다.
보지 못했던 그림자가 있었다.
그가 내 어깨너머로 숨을 고르고, 아주 조금, 자신의 피를 문양의 모서리에 닿게 했다.
삼각의 둘레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나는 그날 밤, 울음이 칼에 먼저 가 닿는 소리를 들었다.
칼보다 울음이 날카로웠다.
그 사실이 나를 죽였고, 다시 살렸다.
불길이 잦아들 무렵, 하랑이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피 방울이 맺혔다.
그 조그만 붉음이, 이 방의 모든 붉음을 통솔하는 깃발처럼 보였다.
“현조.”
그녀가 불렀다.
그 이름 속에는 수많은 계절이 눌려있었다.
“내가 널 베었을 때, 나는 하나를 지키려다 전부를 잃었어. 부모도, 나도, 그리고 너도.”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이번 생엔, 다르게 끝내고 싶었는데.”
나는 한 발 내디뎠다. 파편이 신발 밑에서 흘그럭하고 몸을 비볐다.
“다르게 끝내려면, 같은 칼로는 안 돼.”
내가 말하자, 가면의 사내가 미묘하게 눈을 좁혔다.
“칼이 같아도, 손이 다르면 된다.”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네 심장은 이미 문양과 연결됐다. 너만이 끊을 수 있다. 사랑으로든, 증오로든.”
나는 숨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셋에서 더 가지 못했다.
심장이 넷을 허락하지 않았다.
“증오를 선택하면, 무엇이 남지?”
내 질문에, 가면의 사내는 아주 작은 미소를 흘렸다.
“남는 게 있다면 그건 증오가 아니지.”
말이 유리처럼 투명하다가도, 모서리는 서늘했다.
하랑이 칼끝을 내렸다.
“내 칼이 더럽혔던 자리는, 내 손으로 씻을 수 없어.”
그녀의 어깨가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러니 네가 살아. 내게 남은 건—”
그녀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문양의 불길이 갑자기 타오르며, 우리의 말끝을 태워먹었다.
가면의 사내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에도 얇은 흉터가 있었다. 오래전에 생겨, 이제는 본인도 잊어버린 줄 알았을 상처.
그는 흉터를 불빛에 비추며 말했다.
“나는 기다렸다. 너희 둘의 끝을.”
“왜.”
“끝이 나야, 내가 시작할 수 있으니까.”
그의 고백은 고요했다.
고요한 고백이 더 잔인했다.
천장은 낮았고, 공기는 무거웠다.
파편 냄새, 먼지 냄새, 피 냄새, 오래된 비 냄새.
모든 냄새가 내 심장 근처로 모여들었다. 내 안의 방이 복잡해졌다.
나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문장으로 정리되는 비극은 비극이 아니다. 그건 요약이다.
비극은, 끝내 설명되지 않는 쪽에서 오래 남는다.
나는 심장 위에 손을 눌렀다.
심장 아래, 아주 오래전부터 문양이 살았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인정했다.
인정은 칼날보다 날카롭고, 피보다 뜨겁다.
“하랑.”
내가 부르자, 그녀는 눈을 들었다.
그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비친 내가 흔들렸다.
“우리가 서로를 끊어내려 할수록, 더 촘촘히 엉키더라.”
나는 숨을 쉬었다.
“그러니 이번엔… 풀자. 잘라내지 말고.”
가면의 사내가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
“풀다?”
“응. 매듭은 칼로 끊으면 쉽게 풀리는 듯 보여도, 실밥이 남는다. 그 실밥이 다음 생의 목을 졸라.”
나는 내 목을 가볍게 짚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박동이 작은 짐승처럼 뛰었다.
“매듭은 매듭으로 푼다. 우리가 묶은 방식으로.”
하랑이 칼을 내려놓았다. 금속이 바닥에 닿으며 아주 짧은 울림을 남겼다.
그 울림은 의외로 따뜻했다.
“그러면… 어떻게.”
그녀의 질문은 어둠 속 물병에 떨어진 작은 조약돌 같아, 동그랗게 파문을 만들었다.
나는 파편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이 베였다.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떨어진 피로 문양이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핏방울이 번지는 궤적을 따라 천천히 글자를 그었다.
칼이 아닌, 손으로.
폭력의 문자는 항상 직선이었고, 내가 쓰는 문자는 둥글었다.
둥근 문자는 매듭을 닮았다.
가면의 사내가 낮게 물었다.
“무엇을 쓰는가.”
“서약의 반대말.”
내가 대답했다.
“서약은 붙이고, 반대말은… 놓는다.”
나는 놓음의 문장을 썼다.
우리의 이름을 적고, 그 옆에 아주 작게 작은 문장을 덧댔다.
—나는 너를 소유하지 않겠다.
—나를 너의 벌로 삼지 않겠다.
—다음 생을 너의 굴레로 예약하지 않겠다.
—사랑을 칼로 증명하지 않겠다.
하랑이 무릎을 꿇고 내 손등을 감쌌다. 그 손은 전생에도 내 손을 이렇게 잡았다.
그러나 이번 생의 온도는 달랐다.
뜨겁지 않았다. 뜨거움을 지나온 온기였다. 오래 견딘 불빛의 온도.
가면의 사내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문양의 한 변을 덮었다.
“놓음은 비겁한 퇴각이 아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걸 인정하는 데, 나도 오래 걸렸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이름.”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문양이 보여준 세 번째 이름. 너였지.”
그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은 종종 고백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희의 그림자였다. 질투와 연민이 섞인 그림자. 증인의 이름으로 서서, 누군가의 불행을 끝내 내 행복의 기원으로 바꾸려던 자.”
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그 욕망이 문양을 완성했고, 그 완성은 너희를 박살 냈다.”
하랑이 눈을 감았다.
한 줄의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갔다.
“그래서 셋이 저주받았구나. 둘이 사랑하고, 하나가 지켜보고. 셋이 모두 갇혔네.”
그녀는 눈을 떴다.
“이 감옥, 문을 여는 열쇠가 있다면… 지금 꺼내자.”
나는 마지막 문장을 썼다.
—우리는 우리를 벌하지 않겠다.
문양이 큰 숨을 내쉬었다. 파편의 불꽃이 동시에 작아졌다.
붉은 삼각의 변이 하나씩 흐려졌다.
그리고 중심, 심장의 자리에 작은 흰 점이 찍혔다.
불꽃이 아니라, 숨이었다.
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
가면의 사내가 손을 들어 자신의 흉터로 내 피를 살짝 훔쳤다.
그는 그 피를 자신의 손목에 그었다.
—나는 증인이기를 멈춘다.
그도 문장을 썼다. 글씨가 조금 떨렸지만, 분명했다.
하랑이 내 손등에 입을 댔다.
—나는 복수로 사랑을 설명하지 않겠다.
그녀의 문장이 닿자, 문양은 더 이상 붉지 않았다.
불길이 물기가 되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검붉은 얼룩은 비 내린 자국처럼 얌전해졌다.
침묵이 방을 넓혔다.
우리는 그 넓어진 방에서 각자의 호흡을 찾았다.
바깥 어디선가 오래된 시계가 정각을 알리는지, 낮은 종소리가 허공을 건너왔다.
시간은 여전히 앞으로만 간다. 비극이 우리를 되감아도, 시계는 앞으로만.
가면의 사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끝났다고 믿고 싶겠지. 그러나 끝은 보통 끝을 닮지 않는다. 흔적이 남는다.”
그의 눈이 나와 하랑을 번갈아 스쳤다.
“흔적을 징으로 착각하지 마라. 북을 매달 곳이 없다면, 전쟁은 시작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적은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덮어쓸 수는 있다.
덮어쓰기가 망각은 아니다.
그건 선택의 두께다.
하랑이 칼을 집어 들었다.
칼을 칼집에 넣는 동작이 아주 조용해서, 오히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그 동작을 보조하는 듯했다.
“나는 네 곁에 서겠다.”
그녀가 말했다.
“칼로가 아니라, 곁으로.”
나는 썼던 문장들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손바닥에 잉크 아닌 피가 번졌다.
그러나 이번엔 뜨겁지 않았다.
피가 내 것이었다. 누가 시켜서 흘린 게 아니라, 내가 흘렸다.
자기 피를 자기 말에 쓰는 일. 그만큼 정직한 문법은 없다.
가면의 사내가 마지막으로 우리를 보았다.
“나는 멀리 서겠다. 증언이 아니라, 침묵으로.”
그가 망토를 여미자, 어둠이 그를 한 겹 싸안았다.
그 어둠은 더 이상 칼의 칼집이 아니었다.
상처가 쉬는 베개 같았다.
그는 한 번도 등을 보이지 않고 물러났다.
문 앞에서 멈추더니, 아주 낮게 말했다.
“만약 북이 다시 울린다면—”
그는 잠시 말을 고르고, 가면 없는 얼굴로 웃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귀를 막겠다.”
문이 닫혔다.
바람이 들어왔다. 어디서 샜는지 모를 바람이었다.
바람은 뛰지 않는다. 바람은 걷는다.
굽은 길을 따라, 파편과 문장 사이를 지나, 우리의 발목을 스치고 나갔다.
나는 그 바람에 눈을 감았다 뜨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이제는 넷까지 셀 수 있었다.
하랑이 내 옆에 앉았다.
우리는 말을 덜어냈다. 말은 늘 넘치기 쉽다. 넘친 말엔 진실보다 습기가 먼저 찬다.
침묵이 말보다 정확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현조.”
그녀가 아주 가볍게 불렀다.
“다음 생, 믿니?”
나는 잠시 웃었다.
“믿고 싶지 않아. 믿는 순간, 오늘을 소홀히 하게 될까 봐.”
그녀도 웃었다.
웃음은 울음의 이웃집이다. 담 하나 건너면 서로의 소리를 듣는다.
“그래. 오늘을 먼저 살자.”
그녀의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살아내자.”
그 말이 방을 환하게 했다.
등불을 켠 것도, 창을 연 것도 아닌데, 환했다.
어쩌면 불길이 사라진 자리엔, 불길보다 밝은 것이 남는지 모른다.
그걸 우리는 보통 ‘다음’이라고 부른다.
나는 마지막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문양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아주 미세하게, 점 세 개가 남아 있었다.
나, 그녀, 그리고 그.
점은 선이 되지 않았다.
함께 있으되, 묶이지 않는다.
그게 우리가 오늘 쓴 문장의 뜻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점들을 천천히 긁어 비슷한 거리를 만들어주었다.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간격.
사랑이 숨 쉬기에 적당한 거리.
복수가 길을 잃기에 충분한 거리.
증언이 입을 다물기에 알맞은 거리.
“가자.”
내가 말하자, 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파편을 밟지 않고 방을 나왔다.
파편을 밟지 않는 기술을 사람들은 성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기술이 아니라, 선택의 방향이다.
문 밖, 공기가 새것처럼 맑았다.
밤은 아직 밤이었으나, 밤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우리는 그 부드러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서 북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착각이었다.
북은 내 안에서만 울렸다.
그 북은 천천히 작아졌다.
마침내, 심장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번엔 우리가 살아남자.”
하랑이 내 옆에서 같은 말을, 같은 박자에 맞춰 따라 했다.
“이번엔 우리가 살아남자.”
그리고, 밤이 우리를 가볍게 덮었다.
불길이 남기고 간 자리에서, 온기가 길을 냈다.
우리는 길의 방향을 묻지 않았다.
살아내는 쪽으로, 두 걸음.
사랑하는 쪽으로, 한 걸음.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쪽으로, 반 걸음.
그렇게, 저주와 서약의 문장을 지나왔다.
다음 장의 여백이, 눈앞에서 조용히 펼쳐졌다.
여백은 칼보다 넓고, 피보다 오래간다.
우리는 그 여백에, 이번 생의 첫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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