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여백의 불길

by Helia

문이 닫히자, 우리를 둘러싸던 불길의 냄새가 서서히 식었다. 쇠비린 향 대신 풀잎을 문지른 듯한 쌉쌀함이 들고났고, 숨이 폐 깊숙이 닿았다가 가볍게 돌아왔다.
하랑은 칼을 품에 넣었지만 손끝의 떨림은 남아 있었다. 전쟁이 막 지난 손의 떨림, 피로가 체온을 잠식한 뒤에야 드러나는 허기의 떨림.

“끝난 걸까.”
그녀가 물었다. 끝이라는 낱말은 늘 우리에게 낯설었고, 낯설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맥박이 가느다랗게 뛰었다. 살아 있다는 신호가, 이렇게도 조용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자주 잊는다.

복도는 짧았고, 벽마다 얌전히 붙어 있던 양초들이 우리가 다가갈수록 몸을 떨었다. 불꽃은 생물처럼 숨을 쉬었다. 쏠리고, 낮아지고, 다시 고개를 든다. 끝의 모양을 실시간으로 고치고 있는 듯했다.
복도 끝에는 오래 닳은 철문 하나. 누군가의 손바닥이 지나간 자리마다 은빛이 닦여 반짝였다. 지나온 사람들이 손을 얹고, 마음을 떼고, 다시 남겨두고 갔을 지문들.

“차갑다.”
하랑이 문고리를 잡자, 그 말이 김처럼 흩어졌다.
“열자.”
내가 말했다. 불꽃들이 동시에 떨었고, 문이 낮게 신음을 흘리며 벌어졌다.

어둠일 줄 알았던 너머는, 바람 부는 언덕이었다. 밤하늘은 검푸른 천처럼 넓었고, 멀리 바다의 숨이 실려왔다. 무릎 뒤가 조금 시큰할 만큼, 우리가 갑자기 자유로워졌다.

그때였다.
쿵—.

북소리. 아니, 북소리처럼 들리는 내 심장. 내 안의 북이 어둠의 표면을 두드렸다.
하랑이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살결로 들어왔다. 귀로 막을 수 없는 기억의 리듬. 전생의 혼례, 현생의 저주, 방금 전에 적어 내려간 ‘놓음’의 문장까지—모든 박자가 한데 섞여 쿵, 하고 배 위를 때렸다.

“또 시작이야.”
그녀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안개처럼 번지는 붉은 기운이 언덕 너머에서 올라왔다. 바닥은 잔잔했지만, 보이지 않는 뿌리들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림자가 자랐다.
검은 실뿌리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뭉치고, 마른 손과 닮은 모양, 텅 빈 눈구멍을 가진 형체가 세워졌다. 사람의 외곽, 사람의 온기 없는 복제품.

“피의 문양을 먹고 자란 잔여지.”
내가 낮게 중얼거리자, 그림자 하나가 반응하듯 앞으로 굴러왔다. 하랑이 즉시 칼을 뽑았다. 칼끝이 달빛을 짧게 베었다.

“싸워야겠네.”
그녀가 자세를 낮추었을 때, 그림자 손이 허공에서 길어졌다. 길어진 손이 뱀처럼 목을 노렸다.
하랑의 숨이 걸렸다. 칼이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쇄골과 귀밑 사이, 예리한 공기가 스친 자리에서 작은 소름이 일었다.

“잠깐!”
내가 외치며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에 건조한 흙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우리는 방금 전에, 바로 이 흙 위에 문장을 새겼다.
—나는 너를 소유하지 않겠다.
—복수로 사랑을 설명하지 않겠다.
—우리는 우리를 벌하지 않겠다.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이번엔 숨으로 썼다. 소리 없는 소리. 가슴에서 올라와 혀끝에서 빛으로 바뀌는 낱말.
“우리는 살아내겠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림자 손이 움찔했다. 허공에서 꺾인 손목이 모래처럼 부서졌다. 그러나 다른 그림자 둘이 빠르게 틈을 메웠다. 한 놈은 내 발목에 달라붙어 체온을 훔치려 들었고, 다른 놈은 뒤에서 하랑의 팔꿈치를 끌어내렸다. 무게가 있었다. 공포는 언제나 무게를 만들어낸다.

“말로 이긴다면서.”
하랑이 이를 악물었다.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언덕의 침묵을 깨뜨렸다.
“말은 칼보다 늦게 도착해.”
내가 대꾸했다.
“하지만 한 번 도착하면, 칼이 못 하는 걸 한다.”

나는 허리를 숙였다. 발목을 끌어내리던 그림자가 내 체온을 낚아채 가려는 순간, 손가락으로 흙 위에 원을 그렸다. 둥근 문장, 둥근 숨.
—나는 증인이기를 멈춘다.

그림자들이 잠깐 휘청거렸다. 텅 빈 눈구멍 속에 동그란 무늬가 번졌다 지워졌다.
그 틈을 타 하랑이 몸을 비틀어 빠져나왔다. 칼이 그림자의 팔을 스쳤다. 베어 지지 않는 살, 그러나 흔들리는 자국. 칼은 이길 수 없지만, 흔들리게 할 수는 있다. 그게 시간을 벌어준다.

“현조!”
하랑의 목을 노리던 손이 다시 뻗었다. 이번엔 더 빨랐다.
나는 손바닥을 틀어 흙을 밀었다. 흙먼지가 일면서 바람을 만들었다. 바람 안에 낱말을 던졌다.
—우리는 우리를 벌하지 않겠다.

그 말이 그림자 손등에 닿았다. 손등의 검은 살결이 미세하게 벗겨졌다. 벗겨진 자리에 비늘 같은 글자가 돋았다. 벌(罰)을 지워버리는 문장. 스스로에게 내리던 판결을 아주 조금 늦추는 선언.

그림자들이 일제히 뒤로 물렀다. 바람이 언덕의 윗부분을 쓸고 갔다. 휘청, 하는 소리. 넘어지지 않았지만 넘어질 준비가 된 소리.
하지만 북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쿵—.
쿵—.
이번엔 바다 쪽에서, 파도가 모래를 밀어내는 리듬과 겹쳐 들렸다. 북은 파도를 따라왔다. 살아 있다고 말하는 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북.

“끝이 어딘데.”
하랑이 낮게 물었다.
“끝은 보통 끝처럼 보이지 않더라.”
내가 웃음기 없는 웃음을 지었다.
“흔적 같거나, 여백 같거나.”

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왔다.
—여백은 불씨가 자라는 자리다.

우리는 동시에 돌아봤다. 가면을 벗고 떠나던 그가, 언덕 그늘에 서 있었다. 멀리서도 그의 흉터가 보였다. 오래전에 생겨 이제는 잊었다고 믿던 표식.
“우리를 두고 떠난다더니.”
하랑이 경계하듯 칼끝을 낮게 겨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떠났지. 다만 북이 널 데려가려는 소리를 들었다. 귀를 막겠다고 했지만, 대신 길을 보려고 왔다.”

“길이라면 바다 쪽이야.”
내가 손으로 지평선을 가리켰다. 달빛이 갈라놓은 잔잔한 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파도에 잠깐 닿고,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바다는 늘 끝을 닮지만, 사실은 시작에 가깝다. 너희가 쓴 문장의 끝이, 거기서 다른 글자로 변할 거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림자들이 남쪽으로 움직였다. 파도를 따라, 묵묵히—그러나 뚜렷하게.
“저건 뭐지?”
하랑이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우리가 버린 것들.”
내가 대답했다.
“버렸다고 믿지만 아직 흔들릴 때마다 돌아보는 것들. 소유하려는 습관, 복수로 사랑을 입증하려는 충동, 증언으로 타인의 삶을 파는 자존감. 바다가 빨아들이고 있어.”

“그럼 가만히 두면 되겠네.”
하랑이 칼을 내려놓으려 할 때, 그림자 하나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우리의 발치로 달려들었다.
가장 날렵한 입자, 가장 집요한 잔여.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 사이 빈틈을 보자마자 파고들었다. 우리는 가까스로 피해냈지만, 그림자는 좌절을 먹고 더 얇아졌다. 얇아진 칼날은 더 깊이 들어온다.

“이건 말만으로 안 꺼져.”
하랑이 왼손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숨이 억, 하고 다쳤다.
“말이 늦을 뿐이지, 사라지진 않아.”
나는 목이 메인 채로 웃었다.
“행동을 한 줄만 더 쓰자.”

우리는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흙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여백 위에 우리가 직접 들어갈 차례.
나는 내 손에 끼고 있던 얇은 반지를 풀어 흙 속에 반쯤 묻었다.
하랑은 칼집을 내 무릎 쪽으로 밀어주었다. 칼이 필요한 날들로부터 잠시 비켜서겠다는 몸짓.
그는—그림자였고 증인이었던 남자는—자신의 망토를 벗어 바람의 방향을 눌렀다. 우리 셋이 만든 작은 원이 바람의 길을 바꾸고, 그림자들의 발목을 잠깐 붙들었다.

나는 숨으로, 하랑은 칼끝으로, 그는 망토의 궤적으로 같은 문장을 썼다.
—우리는 살아내겠다.
단순한 미래형의 다짐이 아니라, 현재형의 연습문. 지금을 살겠다는 문장.

그 문장이 땅의 피부에 스며들 때, 그림자들이 한 번에 꺾였다. 마치 등줄기를 누가 가볍게 눌러준 것처럼. 단단하게 묶여 있던 매듭이 헐거워지고, 그 사이로 공기가 통했다.
공기가 통하면, 증오는 오래 있지 못한다. 잿빛으로 마르거나, 빛으로 엷어진다.

북은 조용해졌다. 대신 파도가 분명해졌다. 멀리서 하얀 선이 끊어지고 잇는 소리. 올라오는 숨, 내려가는 숨.
우리의 심장과 파도가 같은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어?”
하랑의 목소리가 아주 가벼워졌다.
“끝이 우리한테 허락되기 시작했어.”
내가 대답했다. “끝을 미루는 버릇을 조금씩 고치는 중.”

그가 우리 사이의 거리를 한 걸음 벌렸다.
“나는 여기까지.”
“그래도… 네 이름을.”
내가 입을 열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 이름은 내게 맡겨둬. 누군가의 입에서 계속 불릴 때, 그 이름은 또 다른 굴레가 되니까.”

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떠난 방향을 기억할게. 필요할 때, 그쪽으로 바람을 보낼게.”
그는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내 귀는 오늘, 북 대신 파도를 듣는다.”

그가 멀어질수록 그림자들이 더 조용해졌다. 파도는 더 선명해졌다. 언덕 아래, 짙은 어둠을 헤치고 작은 불빛 하나가 깜박거렸다.
“저건… 등대?”
하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 바다 끝에서 누군가가 불을 돌리고 있었다. 일정하지 않은 간격, 그러나 분명한 의지. 어둠의 문장을 끊어주는 쉼표.

“가자.”
내가 말했다.
“이번엔 바다 쪽으로.”

우리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편을 밟지 않는 걸음. 벼랑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허락하는 속도.
바람이 등을 미는 대신, 옆에서 균형을 잡아주었다. 혼자 넘어지지 않게, 둘의 여백이 서로에게 닻이 되었다.

내려가는 길, 하랑이 불쑥 물었다.
“무서워.”
솔직했다. 감춘 울음이 아니었다. 고백은 언제나 칼을 무디게 한다.
“나도.”
내가 대답했다.
“무서워서 좋다. 도망칠 수 있음을 아는 게, 서 있는 데에 더 도움이 되니까.”

우리는 웃었다. 웃음은 울음의 이웃이고, 파도는 북의 친척이다. 같은 혈육이 서로 다른 집을 지키듯, 같은 과거가 서로 다른 미래를 만든다.

등대가 가까워질수록, 불빛의 간격이 조금씩 일정해졌다. 우리 걸음과 맞추려는 듯, 하나 둘 셋 쉬고, 하나 둘 셋 쉬고. 파도의 복잡한 호흡이 등대의 단순한 관절을 따라 정리되었다.

등대 아래에는 작은 방파제가 있었다. 축축한 돌들 사이로 바닷물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돌 위에 누군가의 고무장갑 한 짝, 녹슨 못, 반쯤 부러진 나무 줄자, 그리고 접힌 쪽지를 눌러놓은 조약돌.
하랑이 조심스레 돌을 들어 올렸다. 쪽지를 펼치자, 물에 번진 글자가 드문드문 살아 있었다.

—이 등불은, 돌아오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갈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쪽지를 접었다. 말은 늦게 도착했지만, 도착하고 나니 우리의 손이 바뀌었다.
하랑이 칼을 칼집에 깊게 밀어 넣었다. 칼집이 처음으로 제 역할을 다하는 소리.
나는 반쯤 묻어 두었던 반지를 다시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낡아진 은빛이 밤을 조금 덜 차갑게 만들었다.

“현조.”
그녀가 부른다.
“다음 생을 믿니?”
나는 바다를 보았다. 검고, 넓고, 살아 있었다.
“오늘을 믿고 싶어.”
나는 천천히 말했다.
“오늘을 잘 믿으면, 다음은 오늘의 연장선이 될 거야. 그게 다음 생이라 부르든, 내일이라 부르든.”

하랑이 웃었다. 등대의 불빛이 그녀의 눈에 찍혔다. 푸른빛 한 조각이 눈물샘 자리에서 반짝이다 사라졌다. 울지 않았다. 울음을 지나온 웃음이었다.

우리는 방파제 끝에 나란히 섰다. 발밑으로 물이 들고 났다. 파도는 한 번도 같은 모양으로 부서지지 않았다. 매번 달랐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나는 속으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새 문장을 썼다.
—우리는 살아내겠다.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지 않겠다.
—우리는 우리를 벌하지 않겠다.
—우리는 지금을 믿겠다.

그 문장이 겨우 내 가슴에 닿았을 때, 멀리서 배 한 척이 검은 선으로 나타났다. 등대가 신호를 보냈다. 배가 아주 작게 방향을 틀었다.
바다는 늘 시작을 품고 있었다. 시작은 늘 작았다. 작아서 놓치기 쉽고, 작아서 오래간다.

“가자.”
하랑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명백한 현재형이었다.
우리는 등대 옆, 좁은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의 표면에는 오래전 누군가의 발자국이 얕게 새겨져 있었다. 두려워 떨던 발자국, 주저하다 멈춘 발자국, 다시 걷기 시작한 발자국.
그 발자국들 사이로, 우리는 우리의 발자국을 더했다. 얇지만 끊기지 않는 선.

밤이 우리를 덮었다. 그러나 어둠은 더 이상 칼의 칼집이 아니었다.
한 번도 같은 모양으로 부서지지 않는 파도처럼, 우리의 다음 문장도 매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다름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등대가 한 번 더 깜박였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 그 불빛을 보았다.
불빛이 우리 눈동자에 찍혀, 아주 작은 별이 되었다.
그 별이 가슴으로 흘러들고, 심장이 그 빛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우리가 살아남는다.
마침표 대신, 숨.
다음 행을 위해 남겨둔 여백.
그 여백이, 우리를 앞으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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