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부정할 수 없는 사랑

by Helia

그 여백이, 우리를 앞으로 밀었다.
등대 불빛은 어둠을 쪼개며 깜박였고, 방파제 끝에서 그 빛은 파도의 리듬과 섞여 심장처럼 뛰었다.
세 번, 두 번, 다시 세 번. 불빛의 간격은 우연 같지 않았다. 마치 우리 심장에 맞춘 암호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의 흉터를 움켜쥐었다. 전생에서 남은 피의 흔적이, 등대 불빛과 함께 미세하게 욱신거렸다.
하랑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 손은 아직도 싸움의 떨림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두려움보다 불안에 가까웠다.
“현조, 저 불빛… 우리를 부르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답해야겠지.”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짠내와 함께 오래된 숨결이 섞여왔다. 계단은 축축했고, 수없이 오르내린 발자국들이 얕게 새겨져 있었다. 주저하다 멈춘 발자국, 돌아섰다가 다시 내려온 발자국, 끝내 끝까지 밟은 발자국. 그 위로 우리의 발자국이 겹쳐졌다.

등대 밑에는 낡은 나무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바닷물 냄새와 함께 촛불이 꺼지고 남은 그을음이 흘러나왔다.
하랑은 망설였으나, 나는 문을 밀었다.

안에는 작은 책상이 있었다. 그 위엔 눌러둔 조약돌과 젖어 번진 종이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하랑이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번진 글씨 사이로 몇 줄이 간신히 남아 있었다.

—이 등불은, 돌아오는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가닿을 수 없다고 믿는 이를 위한 것이다.

그 순간, 바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바람에 섞인 듯했으나 곧 명확해졌다. 아이의 울음.

하랑의 손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들었어?”
나는 숨을 삼켰다. 파도를 타고 전해진 그 울음은 내가 잊었다고 믿었던 목소리였다.


등대 불빛이 크게 번쩍이며 바다 위를 비췄다.
그 빛 아래에서 물결이 모여 얼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얼굴,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의 윤곽.

하랑의 무릎이 꺾였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설마… 우리…”

나는 손바닥의 흉터를 더 세게 눌렀다. 뜨겁게 뛰는 고통이 심장을 찔렀다.
“아이의 이름이… 문양에 새겨져 있었던 거야.”

바다는 울부짖듯 요동쳤다. 아이의 얼굴이 물결 속에서 일렁였다. 그 울음은 등대의 벽을 흔들며 우리를 무릎 꿇게 했다.

하랑은 흐느끼며 칼을 움켜쥐었다.
“내 손으로 널 베던 날… 혹시 그 아이도 같이 죽인 건 아닐까?”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였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손잡이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네가 죽인 건 내가 아니라 우리 둘의 고통이었어. 하지만 아이는… 우리가 지키지 못한 사랑이었지.”

그 순간,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나는 아버지였나, 아니면 가해자였나.
아이의 울음은 내 심장을 두 번 찔렀다. 한 번은 피로, 또 한 번은 침묵으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너희가 죽더라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동시에 돌아봤다.
계단 위, 붕대로 눈을 가린 사내가 서 있었다. ‘남겨진 증언’.
그는 등대 불빛을 등지고 있었다.

“네가… 그 아이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물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처음부터 네 번째 이름의 증인이었다.”

하랑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칼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번엔 들지도 못하고, 단지 무릎 위에 눌렀다.
“왜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랑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 아이의 이름은 등대처럼 남아 있었으니까.”

하랑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차라리…”
그녀의 목소리는 부서진 유리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말했다.
“네가 몰랐다면, 아이는 완전히 지워졌을 거다. 지워진 사랑은 저주로 남는다. 하지만 기억된 사랑은… 구원일 수도 있지.”


바다는 더 크게 요동쳤다. 아이의 얼굴은 파도에 의해 흩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하랑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물이 내 목을 적셨다.
“이번 생에서라도 그 아이를 기억하자.”
내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단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을, 저주로 만들지 말자.”

하랑은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 가장 큰 저주였구나. 하지만 동시에… 가장 큰 구원이기도 했어.”

등대 불빛이 마지막으로 크게 깜박였다.
그 빛이 바다와 방파제를 동시에 비추었다.
아이의 울음은 점점 잦아들었고, 대신 파도의 숨결이 남았다.


남겨진 증언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이제 네 번째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는 바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이름을. 너희가 지워버린 줄 알았던 그 이름을.”

나는 숨을 삼켰다. 가슴 깊숙이, 오래전에 묻어둔 음절들이 밀려왔다. 그러나 입술은 굳어졌다.
하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를 용기가 없어…”

나는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우리 둘이 함께 부르자. 사랑은 나눌 수 없지만, 기억은 나눌 수 있어.”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파도가 크게 부서졌다.
물결 위로 작은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엄마.
—아빠.

하랑의 울음이 무너졌다.
“듣고 있구나…”
나는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랑은 부정할 수 없었다. 부정하는 순간, 다시 돌아와 우리를 무너뜨렸으니까.


등대의 불빛이 고요하게 깜박였다. 이제는 혼란스럽지 않았다. 규칙적인 리듬, 심장박동처럼 안정된 간격.
남겨진 증언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 네 번째 이름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기억된 사랑은 저주가 될 수 없다.”

그는 망토를 여미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그의 등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다는 잔잔해졌다. 아이의 얼굴은 파도에 섞여 사라졌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귓속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안은 채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지키자.”
내가 말했다.
“이번엔 살아내자.”
하랑이 대답했다.

등대 불빛이 우리 눈동자에 찍혔다. 그 빛은 더 이상 길잡이가 아니었다.
그건 사랑의 증거였다.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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