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복수의 서약

by Helia

그건 사랑의 증거였다.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사랑.
그러나 사랑이 빛이라면, 그 빛은 언제나 그림자를 낳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려왔다.

등대 불빛이 깜박이며 바다 위로 금빛 길을 드리웠다. 하랑은 내 손을 붙잡고 떨고 있었다. 눈물로 젖은 얼굴, 흘러내린 한 줄기 울음 속에 아이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엄마.
—아빠.

짧고 낮은 울림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칼끝보다 더 깊게 가슴을 베어냈다. 나는 숨이 막혀 하랑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바다가 갈라졌다. 잔잔하던 수면이 뒤틀리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불길처럼 붉은 기운이 그 그림자를 감쌌다. 그 형체가 등대 불빛에 드러나는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하랑이 입술을 깨물며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현조… 저건 네 형이야.”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눈앞에 선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했다. 현생에서도, 전생에서도, 언제나 내 위에 서 있던 존재.

나는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형.”


그는 웃었다. 피눈물이 눈에서 흘러내리며 바닷물과 뒤섞였다.
“현조, 이번엔 네 차례다.”

그 목소리는 저주였고, 동시에 오래된 기억의 잔향이었다.
혼례식 날, 내가 쓰러지던 그 순간에도, 귓가를 파고들던 목소리.

하랑이 고개를 저으며 비틀거렸다.
“설마… 설마 지금까지의 모든 게….”

남겨진 증언이 계단 위에서 내려오며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맞다. 네가 원망했던 모든 비극은 그의 계략이었다. 하랑, 네 부모의 죽음도. 현조, 네 부모의 죽음도. 모두 그의 손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뭐라고…? 부모님을… 형이 죽였다고?”

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는 장애물이었다. 너희 둘의 굴레를 완성하려면, 고아여야 했으니까. 그래야 사랑은 더 처절해지고, 증오는 더 날카로워진다.”

하랑이 무릎을 꿇으며 절규했다.
“그럼 나는… 네 손에 부모를 잃고, 그 분노로 현조를 찔렀던 거야?”

“그래.” 형이 대답했다. “너의 분노는 내가 조율한 선율이었지. 네 칼끝은 나의 악보 위에서 연주된 음표였다.”


나는 무너져 내릴 듯 서 있었다. 피를 나눈 형, 내 혈육이자 내 삶의 시작이었던 존재가 모든 비극의 주인이었다니.

“왜…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내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

형은 바다 위에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등대 불빛이 그의 얼굴을 드러냈다. 전생의 그림자가 아니라, 현생에서도 살아 숨 쉬는 나의 형이었다.
“사랑은 굴레다. 그 굴레를 끊어내려면 더 큰 피가 필요하다. 부모도, 아이도, 네 생명도 그 굴레 위에 흩뿌려져야 한다.”

그의 눈은 불길처럼 번쩍였다.
“나는 구경꾼이 아니다. 나는 설계자다. 전생에 실패했으니,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완성할 것이다.”


하랑이 눈물을 흘리며 칼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손은 심하게 떨렸다.
“나는 내 복수심을 내 의지라 믿었어. 하지만 그 모든 게 네 손바닥 위였다니….”
칼끝이 바닥에 부딪히며 덜그럭 소리를 냈다.
“나는 아이마저 지켜내지 못했어. 내 손으로, 내 복수심으로….”

그녀의 울음은 바다에 번졌다. 그 순간,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겹쳐 들렸다.
—엄마.

하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이까지 잃게 만든 건 나야….”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눈물이 눈가에 고였지만,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 모두 그의 계략 속에서 놀아난 거야. 이번엔 다르게 해야 해.”


형이 검을 뽑아 들었다. 불길이 칼날을 타고 흘렀다.
“그래, 다르게 해 봐라. 동생이여. 내 손에 죽을지, 네 손에 날 배신할지. 피는 어차피 한 곳으로 흘러간다.”

남겨진 증언이 손을 들자 등대 불빛이 그의 손끝에 모였다.
“이 굴레를 끊을 수 있는 건 너희뿐이다. 사랑을 저주로 두지 마라. 피로 시작된 굴레는 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피가 복수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흘러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폭풍 속에서 진동했다.

나는 칼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흉터가 다시 터지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칼자루가 피에 젖었다.
나는 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형, 이번엔 내가 널 베겠다. 부모님의 원수로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네 동생으로서.”


파도가 치솟았다. 형이 웃었다.
“베어라. 하지만 네가 날 베는 순간, 넌 나와 같아질 것이다.”

하랑이 일어섰다. 눈물에 젖은 얼굴에 결의가 서려 있었다.
“이번엔 내가 선택한다. 복수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우리는 등을 맞댔다. 바람이 불어왔다. 파도 속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잊지 마.

형의 칼끝이 내 눈앞에서 번쩍였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전생의 죽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번엔 정면으로 맞섰다.


방파제가 흔들렸다. 등대 불빛이 바다 위로 쏟아졌다.
사랑과 복수, 피와 빛이 교차하는 순간.

나는 형의 눈을 마주했다. 그 눈 속엔 피눈물과 함께, 부모의 죽음과 아이의 죽음, 그리고 내 운명이 모두 비쳐 있었다.

“형… 이번엔 내가 널 끝내겠다.”

피의 서막은 이미 열렸다.
그리고 그 복수의 막은, 형과 동생의 피로 쓰인 운명 위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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