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맺어진 인연
파도는 끝없이 부서졌다. 폭풍우는 하늘을 갈라치며 칼끝 같은 빗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방파제 위, 등대 불빛은 흔들리면서도 꺼지지 않고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움켜쥔 채 칼을 잡고 있었다. 흉터는 불에 달군 쇠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맞은편, 바다 위에 선 형은 전생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이제 피눈물에 젖어 있었다.
“현조.”
형은 낮고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날카로운 비수였다.
“우린 같은 피다. 피로 맺어진 인연은 부정할 수 없다. 네가 살아 있는 한, 나는 완성되지 않는다.”
하랑이 내 곁에서 칼을 치켜들며 외쳤다.
“인연은 피로 묶이는 게 아니야! 사랑으로 이어지는 거야!”
형의 웃음은 파도에 섞여 들렸다.
“사랑? 허상이지. 네가 부모를 잃고 복수를 외치며 칼을 든 것도 사랑이었나? 아니, 피가 너를 이끌었다. 그 피가 네 아이마저 삼켰다.”
하랑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그건… 내 잘못이야. 내 복수심이 아이를 앗아갔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나는 떨림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형이 짠 계략이었어.”
형이 웃으며 칼끝을 들어 올렸다.
“그래, 내가 짰다. 너희 부모도, 네 부모도. 혼례식의 피도. 아이의 죽음도. 다 내가 설계했다. 부모들은 무력했다. 나에게 남긴 건 굴레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굴레를 새로 썼다. 더 강하게. 더 처절하게.”
내 안에서 분노가 솟구쳤다.
“그게 네 동생을 죽이고, 부모를 죽인 이유였단 말이야?”
형의 눈이 번뜩였다.
“부모는 날 선택하지 않았다. 너를 사랑했고, 너를 지켜줬다. 나는 그림자였다. 버려진 피였다. 그래서 그 피를 부정하기로 했다. 증오로만 이어진 피가, 진짜 인연이다.”
하랑이 울부짖었다.
“네가 부모를 죽이고, 나를 속여 현조를 죽이게 만들었어! 진짜 원수는 현조가 아니라… 바로 너였어!”
그녀의 절규에 폭풍이 더욱 요동쳤다. 등대 불빛이 크게 흔들리며 바다를 가로질렀다.
남겨진 증언이 계단 위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등대 불빛이 그의 손끝에 모였다.
“그는 전생과 현생의 경계를 넘어선 자다. 피와 원한으로 스스로를 구속한 자! 그의 존재는 저주다!”
형이 증언자를 향해 웃었다.
“네가 또 남아 있었구나. 그러나 넌 증인이 될 뿐, 주인이 될 수 없다. 내 설계에서 넌 단지 목격자일 뿐이다.”
그 순간, 등대 불빛이 증언자의 손에서 폭발하듯 번졌다. 눈부신 빛이 형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웃음이 잠시 흔들렸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형의 칼날이 곧장 맞부딪혔다. 쇳소리가 번개처럼 터졌다. 팔이 저려 칼이 흔들렸다. 형은 내 귀에 바람처럼 속삭였다.
“너도 느끼지 않느냐, 현조? 우리 피가 같은 울림으로 진동하는 걸.”
하랑이 달려들었다. 그녀의 칼끝이 형의 어깨를 스치자 붉은 피가 튀었다. 바닷물과 섞여 붉은 파도가 일었다. 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미소 지었다.
“좋다. 피는 흘러야 인연이 증명되지. 동생의 피, 여인의 피. 모두 나를 향해 흘러야 한다.”
하랑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넌 피로 인연을 묶는다 했지? 그럼 봐라. 우리의 피는 널 끊어내기 위한 힘이 될 거야!”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폭풍에 퍼졌다. 그 순간, 바다 위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싸우지 마.
—잊지 마.
나는 심장이 무너지는 듯한 울림을 느꼈다. 아이의 목소리는 칼보다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힘이 되었다.
“그래, 우린 피로 맺어졌지만, 사랑으로 다시 이어질 거다.”
나는 칼을 치켜들며 외쳤다.
“이번엔 사랑으로 널 끝내겠다, 형!”
형의 웃음이 폭풍에 섞였다.
“사랑이 피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구나. 어리석다. 너는 결국 나와 같아진다. 네 피는 내 칼끝에 흘러야만 한다.”
그의 칼이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맞받았다. 쇳소리가 폭풍보다 크게 터졌다. 충격이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하랑이 내 옆에서 칼을 높이 들었다. 그녀의 눈은 흔들렸지만, 결의로 빛났다.
“이번엔 내가 선택한다. 복수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싸운다.”
우리는 등을 맞댔다. 폭풍이 우리를 감쌌다. 등대 불빛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실루엣을 하나의 그림자로 겹쳐놓았다.
형의 칼끝이 다시 번쩍였다. 그 순간, 내 손바닥에서 피가 터져 나와 칼자루를 적셨다. 붉은 방울이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부모의 죽음, 아이의 상실, 전생의 비극이 겹쳐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또 다른 그림자를 보았다. 내 안의 두려움, 내 안의 증오.
“형… 이번엔 내가 널 끝내겠다. 부모의 아들로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네 동생으로서.”
피가 파도와 섞여 방파제를 붉게 물들였다. 폭풍우가 하늘을 찢었고, 등대 불빛은 마지막 저항처럼 번쩍였다.
형의 칼끝이 내 눈앞으로 향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전생의 죽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번엔 정면으로 맞섰다.
피로 맺어진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 피 위에, 사랑이 새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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