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현재
폭풍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 고요해졌다. 그러나 그 고요는 파도 속에 등을 말아 숨은 짐승의 호흡이었다. 방파제의 돌들은 젖은 심장처럼 미세하게 떨렸고, 등대 불빛은 흔들리면서도 꺼지지 않은 채 우리 셋의 그림자를 번갈아 드러냈다.
내 손바닥의 흉터가 다시 뜨겁게 붙었다. 흐르는 피가 칼자루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하랑은 내 등 뒤를 지키며 칼을 움켜쥐었고, 형은 바다 위, 어둠과 불길의 경계에 서서 미소를 걸었다. 피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바다에 섞였다.
“동생아.”
형의 목소리는 지금도 감미로웠다. 어릴 적 불러주던 자장가처럼 낮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언제나 칼날의 이면이었다. “네 피가 뛰는 한, 내 굴레는 완성되지 않아. 너를 지우면, 나는 드디어 온전해지지.”
“이번 생에서도 날 죽이려는 거냐.”
이가 들러붙을 만큼, 나는 천천히 묻었다.
“이번 생도, 전생도.” 형은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있다면 나는 결핍이다. 그 결핍을 메우는 방식은 하나뿐이야.”
하랑이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그만해. 더는 네 무대에서 움직이는 장난감이 되지 않겠어.”
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장난감이라기엔, 꽤 잘 움직였지. 하지만 알겠나? 지금까지의 현재가, 전부 내가 설계한 무대였다면?”
그 한 문장에, 바람이 내 폐 속까지 차가워졌다.
“…무슨 소리야.”
형이 파도 위에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밑에 검은 문양이 꽃처럼 피었다 사라졌다. “너희가 믿은 ‘지금’은 오래된 굴레 위에 깔아놓은 커튼이었지. 부모의 미소, 친구의 온기, 서로에게 건넨 약속—모두 실제였고, 동시에 덧칠된 것이었다. 선택이라 믿은 것들은 내가 안내한 통로였고.”
“거짓일 리 없어.” 하랑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맺힌 눈물이 빗물과 섞여 얼굴을 타고 흘렀다. “내가 품었던 아이, 내가 쓴 편지, 매일 새벽마다 적어 내린 기도—그게 어떻게 허상이야.”
형의 눈빛이 얇게 웃었다. “허상은 언제나 실재를 흉내 낸다. 아이의 목소리조차 굴레의 잔향일 뿐.”
나는 숨이 걸리는 느낌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럼 지금 이 싸움도 네가 설계한 무대라는 뜻이냐?”
“절반은.”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머지 절반은 너희가 쓴 대사지. 그러나 대본은 내 손에 있었어.”
그때, 등대 계단 위에 서 있던 남겨진 증언이 손을 뻗어 섰다. 붕대 밑의 눈에서 흐릿한 빛이 깜박였다. “그의 말은 절반의 진실이자 절반의 거짓이다. 너희가 살아낸 순간은 실재였다. 다만, 통로가 왜곡되어 있을 뿐.”
“왜곡?” 내가 되묻자, 증언자의 목이 잠깐 떨렸다.
“너희가 걸은 길의 가장자리마다, 그가 그림자를 발라두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네가 웃을 때 그림자는 웃음 뒤에서 줄을 당겼고, 네가 우는 밤 그림자는 울음의 방향을 바꾸었다.”
하랑의 손이 허공을 더듬다 내려왔다. “그럼… 나는 아이를 지킬 선택조차 없었단 말이야? 네가 미리 정해둔 길에서, 나는 내 아이의 무덤이었어….”
그녀의 목소리가 꺼지는 촛불처럼 희미해졌다가, 갑자기 확 타올랐다. “내가… 아이의 무덤이었다고?”
증언자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날을 보았다.” 그의 말이 쇳가루처럼 거칠게 흘렀다. “전생의 혼례식, 피가 쏟아지는 순간, 네 배 속에서 작게 울리던 두 번째 심장을—나는 봤다. 막으려 했다. 등대에서 불을 세 번, 두 번, 세 번—수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난… 그 방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증언자는 문밖에서 울 뿐이었지.”
하랑의 어깨가 무너졌다. 그녀는 칼을 놓치며 방파제에 무릎을 부딪쳤다. 금속성 울림이 파도에 삼켜졌다. “그럼 난… 살아 있는 인형이었구나. 누군가의 서술에 맞춰 울고 웃는—”
“아니.” 나는 그를 끌어안듯 팔을 뻗었다. “네가 흘린 눈물은 대본에 없었어. 네가 내 이름을 부르던 그 밤, 네 목소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어. 네가 아이를 품고 속삭이던 문장은 누구의 설계에도 적히지 않았어.”
형의 웃음이 낮게 울렸다. “아름다운 위로다. 그러나 위로는 칼을 막지 못한다.”
그가 칼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칼날에 번갯빛이 맺혔다 흘렀다. “진실을 하나 더 주지. 나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선택받지 못한 자의 자리에서, 나는 매일 피를 맛보았다. 너는 그 자리를 빼앗아갔지, 현조. 어린 날의 봄날, 그들의 손은 늘 네 어깨에 얹혀 있었어. 나에게 남은 건—문지방과 그림자뿐.”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처음으로, 상처의 색을 드러내는 음. “그래서 나는 피를 택했다. 사랑은 배당이 필요하지만, 피는 나눔 없이 흐른다. 부모를 지우고, 너를 지우면, 비로소 나는 선택받는 자가 된다.”
하랑의 눈이 번쩍 치솟았다. “선택받기 위해 부모를 죽였다고? 동생을 제물로 삼겠다고?”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노는 악보 위 첫 음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굴레가 영원하다는 증거가 될 아이였지. 태어나선 안 됐다.”
그 말에 하랑이 흔들리던 몸을 세웠다. 목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내가 아이의 무덤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아이의 등대가 되겠다.” 그녀가 칼을 다시 쥐었다. “이번엔 내가 길을 비출 거야. 네가 그어둔 통로가 아니라—내가 고른 방향으로.”
등대 불빛이 크게 심호흡하듯 번쩍였다. 그 순간, 바다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빠.
—믿어.
형이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그 목소리마저 덫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덫이어도 좋아. 그 덫에 내 손을 내민 건 내 선택이니까.”
형의 미소가 얇아졌다. “그 선택이 너를 파멸시킬 텐데도?”
“파멸이라도, 내가 고른 문장으로 끝낼 거야.”
바람이 방향을 틀었다. 증언자가 손을 벌리자 등대의 광륜이 그의 팔을 타고 흘렀다. “나는 문밖에서 우는 증인으로 남았지만—오늘은 다르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날, 너의 부모가 쓰러질 때 내가 본 건 두 얼굴이었다. 칼을 내리치는 손의 그림자, 그리고 문턱을 넘지 못한 나의 두려움. 나는 실패했다. 그 실패를 오늘 갚겠다.”
형이 썩은 미소로 증언자를 내려다봤다. “넌 주인공이 될 수 없어.”
“주인공이 아니어도 된다.” 증언자가 허리춤에서 짧은 쇠고리를 꺼내 등대의 외줄에 걸었다. 불빛이 줄을 타고 방파제 가장자리로 번졌다. “빛은 이름을 가리지 않는다.”
그가 손을 내리치자, 빛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방파제의 균열을 메우듯 금빛이 퍼졌다. 형의 발치까지 미세한 흔들림이 전해졌다.
형의 눈이 가늘어졌다. “빛으로 피를 막겠다고?”
“빛으로 방향을 바꾼다.” 증언자의 손끝이 떨렸다. “네가 그어놓은 통로의 각도를.”
나는 그 틈을 탔다. 칼을 낮게 들고 파도의 박자에 맞춰 한 발, 또 한 발. 형의 어깨와 내 눈높이가 같은 선상에 올 때까지.
“현조, 조심해!” 하랑이 등 뒤에서 외쳤다. 그녀의 칼이 내 칼과 사선으로 교차하며 빈 공간을 메웠다. 우리는 등을 맞댄 채, 서로의 사각을 지웠다.
형의 칼이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쇳소리가 밤을 깨물었다. 충격이 손목을 타고 쇄골까지 튀었다. 나는 힘을 빼며 밀어냈다. 칼과 칼 사이로 스친 바람이 귓불을 찢을 듯 매웠다.
“너도 느끼지?” 형이 숨을 스쳤다. “우리는 같은 울림으로 진동한다. 네가 내 칼을 밀어내는 순간, 네 안에서 날 닮은 것이 자란다.”
“그게 두려웠다면 여기 서지 않았을 거야.” 나는 이를 악물고 밀어붙였다. “나는 네 피를 닮지 않기 위해, 내 피를 쓴다.”
형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써라. 얼마나 남았는지 보자.”
칼끝이 엇갈리는 사이, 하랑이 측면에서 파고들었다. 그녀의 칼이 형의 팔뚝을 스쳤고, 붉은 선이 번갔다. 형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또 네가 흐트러뜨리는군.”
“이번엔 네 악보에 연주하지 않아.” 하랑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내 박자는 내가 정해.”
그 순간, 바다가 울부짖었다. 등대 불빛이 붉게 물들며 수면 위로 무수한 얼굴이 떠올랐다. 부모의 얼굴, 하랑의 부모, 그리고 파도 그림자 사이로 번지는 작은 얼굴—우리 아이. 그 얼굴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물의 손가락들이 우리 발목을 더듬듯 올라왔다.
하랑이 비명을 질렀다. “잡아당겨… 손이—!”
그녀의 종아리에 차가운 감각이 감겼다. 나는 즉시 몸을 돌려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물손이 또렷해질수록, 그 손끝에서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사랑이었던 것들의 잔열.
“보여 주마.” 형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네가 믿는 진실이 어떻게 너를 가라앉히는지.”
“아니.” 나는 하랑의 팔을 감싸 안고, 무릎으로 방파제의 거친 돌을 찍었다. “우리가 믿는 진실은 끌어올리는 손이야. 가라앉히는 손이 아니라.”
증언자가 외쳤다. “손을 떼지 마라! 빛을 더 당긴다!”
그의 팔이 떨리며 광류가 굽혔다. 금빛이 물손들을 타고 번졌다. 그 빛은 뜨겁지 않았다. 차갑게 맑았다. 물손들이, 잠시 흔들렸다.
형이 이를 갈았다. “무의미한 발버둥.”
나는 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네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건 선택이었지. 하지만 해석은 못 빼앗는다. 이것이 덫이라면—덫을 붙잡아 사다리로 만든다.”
말과 동시에, 나는 칼을 뒤집었다. 칼등으로 형의 손목을 강하게 쥐어 올렸다. 하랑이 그 틈을 파고들어 손목의 각도를 꺾었다. 형의 칼끝이 수면을 긁으며 불꽃같은 물비늘을 튕겼다.
형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분노가 탈색되었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각도가 바뀌고 있어.”
그의 시선이 등대의 광륜을 따라 증언자에게 박혔다. “네가 감히 내 통로를—”
“오늘만큼은.” 증언자의 목에서 피비린내 같은 숨이 새었다. “문밖의 증인이 아니라, 문지방이다.”
형이 포효했다. 파도가 귓속을 때렸다. 물손들이 마지막으로 우리 발목을 움켜쥐더니—갑자기 방향을 바꿨다. 가라앉히지 않고, 밀어 올렸다. 우리는 동시에 방파제 위로 몸이 들려 올랐다. 순간 등대 불빛이 우리 등을 강하게 밀었다. 물손들이 해변 쪽으로 휩쓸리며, 그 속의 얼굴들이 한 번 더 떠올랐다. 부모의 미소, 아이의 금빛 윤곽.
—믿어.
—살아.
아이의 음성이 확실하게 뚫고 나왔다. 형의 미간이 깊게 찢어졌다. “멈춰!”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하랑이 칼을 교차로 들어 올렸고, 나는 그 칼을 받쳐 올려 형의 가슴 정중앙—피눈물과 미소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칼끝을 겨눴다.
“형.”
내 목소리가 아주 고요했다. “거짓된 현재 위에서라도, 우리가 새긴 문장은 진짜야.”
형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불길이 그의 눈에서 들썩였다. “베어라. 그리고 너의 현재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 보아라.”
우리는 동시에 내디뎠다. 칼날과 심장 사이의 거리가, 숨 한 번의 길이로 줄어들었다.
그때—등대가 크게 흔들렸다. 광륜이 꺼질 듯 흔들리며, 우리 발밑의 방파제가 울컥 내려앉았다. 금빛이 한순간 사그라지고, 어둠이 틈을 벌렸다. 형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되살아났다.
“봐라.” 그가 속삭였다. “현재는 거짓이라니까.”
방파제가 갈라지며 우리 셋의 발밑으로 검은 계단이 펼쳐졌다. 바다 밑, 심연으로 내려가는 문.
물손들이 이번엔 아래서부터 우리를 끌어내렸다. 하랑의 손이 내 손에서 미끄러졌다.
“현조!”
그녀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나는 칼을 내던지고 그녀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어둠의 경사가 너무 가팔랐다. 증언자가 등대 줄을 움켜쥔 채 뛰어들었다. “잡아!”
줄이 우리의 팔에 감겼다. 그러나 형이 칼끝으로 줄을 스쳤다. 섬광과 함께 줄이 반으로 끊어졌다. 상반이 하늘로 튕겨 올라가며 등대 외벽에 부딪혔다. 하반은 심연으로 추락하며 우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마지막 힘으로 하랑을 위로 밀었다. 그녀가 방파제 턱에 손을 걸었다. 손톱이 돌에 갈렸다. 피가 번졌다.
“올라가!” 내가 고함쳤다. “끝내자!”
하랑의 눈이 번개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형이 내 손목을 발로 밟았다. 뼈가 미세하게 비명을 질렀다.
“내려와, 동생아.” 형이 속삭였다. “네가 있어야 이야기가 끝나.”
심연의 바람이 아래에서 올라왔다. 차갑고 오래된, 피비린내의 바람. 그 바람 속에서 수많은 혀가 속삭였다.
—끝내.
—끝내.
—끝내.
하랑이 방파제 위에서 칼을 거꾸로 움켜쥐고 형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은 말랐고, 입술만 붉었다. “이번엔 내가 선택한다.”
그녀가 뛰어내렸다. 칼끝이 공기를 찢으며 형의 어깨를 깊게 파고들었다. 형이 내 손목에서 발을 뗐다. 그 틈을 타 나는 방파제 턱을 움켜쥐었다. 팔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살았다.
형이 비틀거렸다. 어깨에서 검붉은 피가 폭발하듯 솟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좋아… 이제 진짜 막이 오르는군.”
심연이 더 크게 입을 벌렸다. 우리는 방파제 위/아래, 갈라진 현재의 양쪽에 매달린 채 서로를 보았다. 등대 불빛이 마지막으로 번쩍였다가, 툭 하고 꺼졌다.
어둠 속에서, 형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이제, 진짜 현재를 보자.”
그리고 우리 발밑의 계단이—아래로, 아래로—끝없이 펼쳐졌다. 우리는, 각자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거짓과 진실이 뒤엉킨 그 심연으로 끌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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