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반복된다.
폭풍이 한 번 숨을 죽였다. 등대의 마지막 금빛이 스쳐 사라지자, 발밑이 갈라지며 검은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의 손목을 붙잡은 채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파도 소리도, 바람 소리도 사라지고 심장 두 개의 박동만이 또렷하게 울렸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하랑의 것, 그리고 잃어버린 작은 박동이 메아리처럼 겹쳐왔다.
형은 앞서 걸으며 발자국마다 피를 남겼다. 붉은 흔적은 계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 냄새는 차갑게 퍼졌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무대가 걷히면 남는 건 이곳이다. 거짓된 현재가 끝나면 반복된 진실만 시작된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 반복을 부숴야 끝이 나. 부모를 죽이고, 아이까지 앗아간 네 짓을 이번엔 멈추게 하겠다.”
형의 웃음은 고요했고, 피눈물은 빛을 머금었다.
“멈춤은 없다. 네가 칼을 드는 순간, 넌 이미 나와 같은 얼굴이 된다. 부모를 지운 손, 동생을 버려는 손, 결국 같은 근원에서 뻗었다. 선택받지 못한 피의 울음이 우리를 한 줄로 꿴다.”
양옆의 벽에 금이 가더니 장면이 흘러나왔다. 붉은 천 위 혼례, 샹들리에 파편, 피에 젖은 가슴, 등대 불빛, 방파제에서 떨리던 손. 전생과 현생이 겹쳐 흘렀다. 하랑이 숨을 삼켰다.
“우리의 시간들이… 껍질처럼 벗겨지고 있어.”
형은 벽을 스치며 장면들을 찢어냈다.
“껍질은 바뀌어도 속은 같다. 웃음이든 울음이든 칼끝은 같은 자리에 닿는다.”
내 흉터가 다시 타올랐다. 피가 칼자루를 타고 떨어졌다. 그 순간, 아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스며들었다.
—아빠.
—다시 하지 마.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무엇을 다시 하지 말라는 거지?”
형이 웃음을 흘렸다.
“흔들림의 기술일 뿐이다. 아이의 울음도 굴레의 부속품. 네 손을 묶는 족쇄다.”
하랑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덫이라면 내가 고른 덫이야. 그 울음이 없었다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어. 그 애가 내 이름을 부르는 동안, 나는 살아. 내가 아이의 무덤이었다면, 이제는 아이의 등대가 되겠다.”
계단이 붉게 열리며 제단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검은 칼이 꽂혀 있었다. 칼날에 부모의 얼굴이 비쳤고, 아이의 울음이 겹쳐 울렸다.
형은 칼 앞에 서서 속삭였다.
“시작이자 끝. 누가 뽑든 운명은 이어진다. 네가 잡는 순간, 이번 결말은 네 차례다.”
나는 한 발 다가갔다. 하랑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확신이 빛났다.
“반복이라도 괜찮아. 우리가 새긴 문장은 거짓이 아니야. 이번에는 우리가 끝낸다.”
형이 마지막으로 웃었다.
“끝낸다는 말은 언제나 시작의 다른 이름이지. 네가 날 베면, 다음 생에서 네가 된다.”
나는 피 묻은 칼을 들어 올렸다.
“좋다. 네 말대로 얼굴이 돌아온다 해도,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을 새길지는 내가 정한다.”
검은 칼이 심장처럼 떨렸다. 제단의 피가 요동쳤다. 하랑이 결연히 칼을 들어 올렸다. 우리는 등을 맞대고 형을 마주했다.
계단의 벽에서 부모의 손, 아이의 작은 손이 뻗어 나와 우리 발목을 붙잡았다. 차갑지만, 익숙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끌어내리려는 힘이 아니라, 붙들려는 힘이었다.
“붙들어!” 내가 외쳤다. 증언자가 제단 반대편에서 쇠줄을 잡아당기며 불빛의 잔향을 이어 붙였다. 은빛 광륜이 퍼지며 제단을 감쌌다.
형의 칼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우리는 교차로 받아쳤다. 쇳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벽의 장면들이 거꾸로 흘러 사라졌다. 아직 오지 않은 장면 하나가 비쳤다. 내가 형을 베는 모습, 그리고 다음 생에서 형의 얼굴로 웃는 또 다른 나.
아이의 목소리가 그 장면을 뚫고 들어왔다.
—잊지 마.
—끝내지 말고, 바꿔.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형, 반복이 신이라면, 나는 해석으로 맞선다. 결말은 복사하지 않는다.”
하랑이 힘주어 외쳤다.
“아집이라도 괜찮아. 이번엔 내가 주인공이야.”
우리는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칼끝과 심장 사이 거리가 숨 한 번만큼 줄었다. 그 순간, 물손 하나가 형의 발목을 잡았다. 아주 미세한 흔들림. 그러나 운명은 그 미세함에 틀린다.
나는 칼을 제단 중심으로 돌려 박았다. 하랑이 함께 힘을 보태 검은 칼을 심장부로 쳐 내렸다. 제단이 울고, 피가 역류했다. 물손들이 피를 받아 우리를 끌어올렸다. 부모의 손이 등을 받쳤고, 아이의 작은 손이 하랑의 손목을 두드렸다.
—살아.
형이 휘청이며 밀려났다. 눈빛에 당혹이 스쳤다.
“각도가 바뀌고 있어…”
증언자가 은빛 줄을 붙들며 낮게 말했다.
“오늘은 문지방이 문이 된다.”
어둠이 꺼지고, 새벽빛이 심연을 스쳤다. 형이 마지막으로 칼을 들었으나, 이미 무게가 그의 팔목을 눌렀다. 굴레는 매끈해야 돌지만, 우리가 새긴 문장이 거친 면이 되었다.
나는 칼을 내려놓았다. 하랑도 칼을 거뒀다. 형의 칼끝이 허공에서 떨렸다.
“베지 않겠다고?”
“베는 결말은 이미 써봤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 내가 너로 웃게 된다면, 이번엔 복사하지 않겠다. 다르게 쓰겠다.”
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입가가 이상하게 비틀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 그래도 반복은.”
“모양을 바꾼다.” 하랑이 잘랐다. “반복은 있어도, 너처럼 쓰이지 않아.”
심연은 닫히고, 바람은 새벽을 몰고 왔다. 우리는 함께 발을 옮겼다. 같은 박자, 다른 노래. 반복은 여전히 남았지만, 그 위에 새겨진 우리의 문장이 길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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