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선택
새벽은 코앞에 와 있었다. 등대의 불빛은 이미 꺼졌지만, 위쪽에서 흘러내린 바람에는 분명히 아침의 냄새가 스며 있었다. 그러나 발밑은 여전히 심연의 피를 머금은 계단이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삐걱이며 갈라지고, 균열 사이로 붉은 액체가 뿜어졌다. 반복은 흔들렸으되,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하랑이 숨을 몰아쉬며 낮게 속삭였다.
“현조,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무언가 우리를 다시 끌어내리려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의 흉터는 여전히 피를 토해냈다. 그 피가 계단에 떨어지는 순간마다 균열은 깊어지고, 그림자가 손처럼 뻗어 우리 발목을 붙들었다. 제단에 꽂혀 있던 검은 칼은 사라졌지만, 그 파편이 심장처럼 살아 움직이며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낮고, 거칠고, 결코 사라지지 않은 목소리.
“끝내지 않는다고 했지? 그 말이 곧 너희의 무덤이 될 거다.”
심연의 어둠을 갈라 형이 기어올라왔다. 상처투성이의 몸, 피로 젖은 발자국. 그러나 그의 눈빛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붉게 타올랐다. 손에는 칼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 조각은 단순한 파편이 아니었다. 검은 칼의 심장에서 떨어져 나온, 심연의 독을 품은 조각이었다. 조각이 그의 손에서 피어오를 때마다 주변의 계단이 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형은 피 흘리는 어깨를 세우며 웃었다.
“반복은 아직 죽지 않았다. 너희가 길을 바꾸려 한들, 결국 선택은 무너진다. 마지막 순간, 칼은 반드시 심장을 찾는다.”
하랑이 내 앞에 서며 칼을 높이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막을 거야. 네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다.”
형의 웃음은 잔혹했다.
“네 선택이야말로 무너지는 첫걸음이지. 네가 아이를 지켰다고 믿었나? 이미 잃은 걸 아직도 품고 있는 네 손은, 결국 또 다른 무덤을 만든다.”
그 말에 하랑의 손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 아이의 얼굴이 스쳤다. 흙 속에 묻힌 작은 생명, 그녀가 알아채지 못했던, 복수에 눈이 멀어 버렸던 그 아이. 형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넌 늘 잘못 골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선택은 결국 너를 배신한다.”
나는 그녀의 손등 위에 내 손을 덮었다.
“하랑, 흔들리지 마. 아이는 우리가 지키지 못했지만, 목소리는 남았잖아. 그 울음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야.”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작은 숨결이 스며왔다.
—엄마.
—아빠.
희미한 아이의 목소리가 균열 사이로 파고들었다. 핏빛 계단이 흔들리고,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하지만 형은 피식 웃으며 칼 조각을 휘둘렀다. 번쩍이는 궤적이 하랑의 어깨를 스치며 피를 흘리게 했다. 짧은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피가 계단에 떨어지자, 균열은 폭발하듯 퍼졌다. 새벽의 빛이 위에서 부르는데, 발밑의 길은 계속해서 끊어졌다.
형은 웃음을 터뜨렸다.
“봐라. 반복은 결국 무너지는 선택으로 끝난다. 너희는 올라가지 못한다. 심연이 너희를 먹어치울 뿐이다.”
하랑이 이를 악물며 내게 속삭였다.
“현조, 만약 내가 떨어진다면… 이번엔 잡지 마. 네가 올라가야 해.”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이번 생은 우리 둘이 끝낸다. 같이 올라가든, 같이 떨어지든.”
계단이 폭발하듯 무너졌다. 심연과 새벽 사이, 우리는 손끝 하나로 매달린 꼴이 되었다. 균열은 끝없이 벌어졌고, 형은 위쪽으로 뛰어올라 칼 조각을 내리꽂았다. 그 칼끝은 심장을 겨냥했으나, 나는 몸을 틀어 흘렸다. 그러나 어깨를 스친 뜨거움이 피를 튀기며 균열에 스며들었다.
아래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분명하고 또렷했다.
—엄마. 아빠. 선택은… 무너지는 게 아니야. 만드는 거야.
형이 순간 고개를 들었다. 그 붉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만든다고? 네가 만든 선택이 너희를 어디로 데려가는데?”
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무너지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길을 새로 낸다. 굴레가 아니라, 문장을 새긴다.”
형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칼 조각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때였다. 균열에서 솟아난 물의 손, 피의 손, 바람의 손들이 동시에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부모의 손, 조상의 손, 그리고 아주 작은 아이의 손까지.
그 손들은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버티게 했다. 반복을 흔들고, 굴레를 금 가게 하는 손이었다.
하랑이 피투성이 얼굴로 웃었다.
“무너지는 선택이라도 괜찮아. 우리가 만든다면, 그건 무덤이 아니라 다리가 되니까.”
나는 그녀와 함께 칼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칼날을 적시며 붉은빛을 일으켰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지금, 우리가 선택한다!”
칼날이 형의 칼 조각과 맞부딪혔다. 순간, 세상의 심장이 찢어지듯 울렸다. 심연이 한꺼번에 갈라지고, 위쪽의 새벽빛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계단이 무너져 내렸지만, 우리는 그 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귓가를 스친 목소리.
—살아.
그리고 어둠은 닫히고, 빛만이 우리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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