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장|Falling Leaves

추락이 아니라 춤이었다

by Helia

추천 클래식

Vivaldi – Concerto No. 3 in F major, RV 293 “L’Autunno” (The Four Seasons: Autumn), II. Adagio molto


바람이 불었다. 한 장의 잎이 가지에서 떨어졌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였지만, 그 짧은 순간 속에서 나는 삶의 긴 그림자를 읽었다. 낙엽은 매년 같은 자리에 떨어지지만 해마다 다른 빛깔로 마음을 흔든다.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낙엽을 밟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바삭거리는 소리는 장난스러운 웃음 같았고, 허공에 흩날리던 잎은 우리를 따라다니는 종이비행기 같았다. 그때는 그저 계절의 풍경이라 여겼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작고 얇은 잎사귀에도 한 해의 햇살과 비, 계절의 호흡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안다. 떨어지는 건 사라짐이 아니라 완성에 가깝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한다.

아침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바람에 쓸려온 낙엽 하나가 발등에 와닿았다. 무심히 밟고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멈춰 섰다. 잎맥이 햇빛에 반짝이며 마지막 황금빛을 내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래 전의 장면이 겹쳤다. 첫사랑과 헤어진 날,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길. 발밑에 수북이 쌓인 낙엽 위를 천천히 걸었다. 함께였다면 덜 쓸쓸했을까. 그러나 그날의 나는 철저히 혼자였고, 낙엽만이 발자국마다 바스락거리며 동행해 주었다. 낙엽은 그때도 오늘도 같은 말을 건네는 듯했다. “놓을 때가 되면 놓아라. 붙잡고 있어도 계절은 멈추지 않는다.”

몇 해 전, 한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지? 단 세 글자였다. 답장을 쓰다 말고 휴대폰을 덮어버린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그는 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날 창밖에는 낙엽이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이유도 없이 답장을 미뤘다. 돌이켜보면 그 한순간의 머뭇거림이 인연을 꺾어버린 것이다. 낙엽이 가지를 떠나는 순간처럼, 우리의 관계도 그날 땅으로 내려앉았다. 혹시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단 한 번만 용기를 냈다면 붙잡을 수 있었던 사람, 그러나 결국 흘려보내고 말았던 순간. 우리는 모두 보내지 못한 말 위에 쌓인 낙엽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

거리를 걸으면 낙엽은 제각기 다른 춤을 춘다. 어떤 잎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어떤 잎은 곧장 땅에 내려앉는다. 빗물에 실려 떠내려가기도 하고, 누군가의 발끝에 밟혀 흩어지기도 한다. 종착지는 같지만 과정은 다 다르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누구나 언젠가 땅으로 향하지만, 각자의 궤적은 다르게 흔들린다. 어떤 이는 멀리 여행하며 세상을 돌고, 어떤 이는 고요히 제자리에 머문다. 중요한 건 오래 붙어 있는지가 아니라, 떨어지는 동안 어떤 춤을 추는가일지도 모른다. 낙엽은 떨어졌다. 그러나 추락이 아니라 춤이었다.

저녁이 오면 가로등 불빛 아래 흩날리는 낙엽은 불꽃처럼 빛난다. 순간의 아름다움은 짧지만, 본 사람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인생의 찰나도 그렇다. 짧지만 강렬해 평생을 흔든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책상 위로 낙엽 한 장을 데려왔다. 나는 그 잎을 손에 들어 무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결에는 봄의 설렘과 여름의 열기, 그리고 오늘의 쓸쓸함까지 스며 있었다. 세상에 같은 잎맥은 하나도 없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다르지만 각자의 흔적은 분명히 남는다.

낙엽은 나무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다음 해를 위한 준비다. 가지는 잎을 떨궈야 새싹을 틔운다. 붙잡음이 아니라 비움으로 이어지는 생의 법칙. 나는 그 단순한 진리를 낙엽에게서 배운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쥐고 있는 것들이 많다. 오래된 미련, 끝내지 못한 관계, 버리지 못한 기억들.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다 순순히 땅으로 가라앉는 낙엽을 보면 조금은 배운다. 떠남에도 품위가 있고, 끝에도 빛이 있다는 것을.

밤이 깊어가며 낙엽은 더 많이 떨어진다. 바람은 집요하게 나무를 흔들고, 잎들은 그 흔들림에 몸을 맡긴다. 나는 창밖을 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놓을 수 있을까. 더는 쥐지 못하는 것들, 집착과 미련을. 언젠가 나도 바람 앞에서 흔들리며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낙엽은 답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땅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배운다. 억지로 붙잡는 것이 삶이 아니라, 내려놓음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혹시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붙잡고 싶었지만 결국 놓아야 했던 일, 차마 끝내지 못해 더 아팠던 관계, 버리고 싶었지만 한참을 맴돌던 기억. 그때 느낀 서늘함과 고요함이 바로 낙엽의 언어다.

오늘도 수많은 낙엽이 떨어졌다. 내일도 또 수없이 떨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치우고, 새날은 아무렇지 않게 시작된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잎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가 내 안에 쌓여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Falling Leaves. 떨어지는 잎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