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교훈, 오늘의 삶에 건네는 이야기
전래동화는 옛날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않다.
전래동화는 여전히 살아 있다.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밤마다 할머니 무릎에 기대어 듣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장작불이 다다다다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의 또 다른 문이 열렸다.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심청이와 효녀의 눈물. 그때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떠올리면 그것은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삶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흥부와 놀부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욕심으로 가득 차 남을 밟고 올라서려는 사람, 그 반대편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직장에서, 학교에서, 혹은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놀부와 흥부를 동시에 본다. 이야기는 오래됐지만, 상황은 지금도 똑같다.
콩쥐와 팥쥐 역시 그렇다. 어릴 적엔 단순히 ‘착한 콩쥐는 복을 받고, 욕심 많은 팥쥐는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배웠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그 이야기는 직장이나 사회 속 불공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열심히 일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이가 있고, 편법으로 기회를 얻는 이가 있다. 전래동화는 오래된 구도 속에서 오늘의 현실을 여전히 드러낸다.
심청전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어린 날에는 눈물만 흘렸지만, 지금은 마음이 복잡하다. 자기 자신을 버려야만 효가 완성되는 걸까. 전래동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사랑한다는 건 무엇일까? 희생이 전부일까?”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래동화는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그림자와 소망이 뒤섞인 기록이다. 굶주림 속에서 풍요를 꿈꾸고, 차별 속에서 정의를 갈망하며,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야기에 스며 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교훈으로, 어른들에게는 은유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세대를 넘어 전해진다.
나는 요즘에도 전래동화를 다시 읽는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전래동화의 단순함이 위로가 된다. 착하면 복을 받고, 욕심은 벌을 받는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바로 그 단순한 믿음이 우리를 붙잡는다. “세상은 결국 균형을 이룰 것이다”라는 믿음 말이다.
지하철 안에서 오디오북으로 심청전을 듣는 청년을 본 적 있다. 귀에 꽂힌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상상하며, 나는 생각했다. “옛날이야기가 아직도 읽히는 이유는 결국 오늘을 비추기 때문이겠구나.”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다시 피어난 삽화 한 장면조차도 여전히 마음을 건드린다.
흥부와 놀부는 사라지지 않았다.
콩쥐와 팥쥐는 여전히 곁에 있다.
심청이는 여전히 인당수 앞에 서 있다.
전래동화는 세대를 잇는 끈이다. 할머니가 부모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그리고 다시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에게. 이야기는 흘러가면서 각 시대의 해석을 입는다. 어린 시절 나는 흥부의 선함을 닮고 싶었지만, 지금 나는 흥부의 착함보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삶의 균형’을 더 크게 배운다. 같은 이야기라도 나이가 들면 다르게 다가온다.
삶이 벅차고 길을 잃을 때, 나는 전래동화를 떠올린다. 누군가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고, 누군가는 부당함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았으며,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내주었다. 완벽하진 않아도,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나를 일으켜 세운다. 전래동화는 “너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너도 네 방식의 답을 찾아라”라고 조용히 말한다.
연애에 서툴러 눈치를 보고, 직장에서 상처를 받으며, SNS 속 비교로 지쳐 있을 때조차 전래동화는 살아 있다. 놀부 같은 사람을 만나도, 팥쥐 같은 억울함을 겪어도, 흥부와 콩쥐처럼 끝내 스스로의 길을 지켜내는 이야기는 우리를 위로한다.
전래동화는 오래됐다. 그러나 그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 앞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