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만 가는 노래, 사라지지 않는 마음
추천 클래식
쇼팽 – 녹턴 2번 E♭장조 Op.9 No.2
이 노랠 내가 처음 듣게 된 건 라디오에서였다. 낯선 이름의 사연자가 보낸 편지 끝에 흐른 신청곡,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 첫 소절이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이유 모를 끌림에 휘청였다. 가사를 온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고, 그때의 나는 그리움이란 단어의 무게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목소리 하나가 공기 중에 맴돌며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마치 창문을 두드리던 여름 장마 끝 소나기처럼, 불현듯 스며드는 냄새 같은 노래였다.
그날 이후, 이 곡은 내 안에서 비밀스러운 씨앗처럼 자라났다. 시험지 위의 잉크 자국보다 더 선명하게, 길모퉁이 분식집의 어묵 국물보다 더 뜨겁게 남았다. 그리움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나는 그저 따라 부르며 막연히 알았다. ‘아, 이건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구나. 누군가의 가슴속에 평생 꺼지지 않는 불씨 같은 거구나.’
세월이 흘러, 진짜 그리움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이 노래는 다시 나를 찾아왔다. 사랑을 잃고, 친구를 떠나보내고, 가족의 빈자리를 경험하며 알았다. 그리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켜켜이 쌓여 산이 되어간다는 걸. 손으로 만질 수도 없으면서, 발끝까지 무겁게 짓누르는 산. 노영심의 노래가 바로 그 산의 그림자를 닮아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칼날처럼 가슴을 베었다. 감정이 벼락처럼 쏟아졌다가, 이내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파도였다. 밀려올 때는 휘몰아치고, 물러날 때는 모래 위에 발자국만 남겼다. 그 잔상 위에 다시 파도가 덮이듯,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고 쌓여만 갔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여러 얼굴을 떠올린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묵직한 손,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던 어린 시절 친구의 목소리,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세상이 흔들리던 사랑의 순간들. 하나하나가 앨범 속 사진처럼 선명하지만, 잡으려 하면 흩어진다. 그래서 더 아리다. 그리움은 이렇게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데려오는 불청객이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그리움을 이겨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잊어야 산다고.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리움은 짐이 아니라 증거다. 살아 있다는 증거, 사랑했다는 증거, 마음을 다해 누군가와 시간을 나눴다는 증거. 만약 그리움이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공허한 공기만 남은 삶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더 두려운 일이다.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는 단순한 발라드가 아니다. 90년대 라디오를 울리던 명곡이자, 지금 들어도 낡지 않은 고백이다. 그 노래 속에는 화려한 기교도, 과장된 절규도 없다. 그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투명한 선율, 담담한 가사. 그런데도 듣는 이를 무너뜨린다. 오히려 그 담백함 때문에. 화려한 장식이 없으니, 감정의 맨얼굴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움은 누구나 품고 산다.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거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을 그리워하거나, 이루지 못한 꿈을 그리워하거나. 사연은 달라도 감정의 뿌리는 같다. 그래서 이 노래가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다. 가사 속 단순한 반복, “그리움만 쌓이네”라는 문장은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고백이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감정의 곡선을 크게 탄다. 처음엔 잔잔하다가, 중간쯤에선 가슴이 뜨겁게 요동친다. 눈물이 고이다가, 어느 순간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이러니하다. 아픈 노래인데, 듣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이 노래 속에서 나와 닮은 얼굴들을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움은 결국 삶을 지탱한다. 언젠가 내가 가장 힘들었던 날,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아 주저앉아 있던 날에도, 내게 힘이 된 건 희미한 그리움이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함께한 기억이 있었지. 나를 붙잡아줄 시간들이 있었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때 흘러나오던 노래가 바로 이 곡이었다.
지금도 문득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나는 무심코 걸음을 멈춘다. 이어폰 속에서 울리면, 가던 길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움은 그렇게 일상을 흔든다. 잊었다고 생각한 이름이 불쑥 떠오르고, 지나간 얼굴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또다시 새로운 이별이 찾아올 것이다. 오늘의 평범한 순간조차 언젠가는 그리움이 되어 쌓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두렵지 않다. 차라리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움이야말로 나를 단단히 세우는 기둥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노영심의 목소리는 여전히 투명하다. 오래전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을 때처럼.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건, 그 목소리 속에 담긴 정직한 고백 때문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 것, 그게 진짜 명곡의 힘이다.
그리움만 쌓이네. 참 단순한 문장인데, 그 속에는 수천의 이야기와 수만의 눈물이 담겨 있다. 나는 오늘도 그 노래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속으로 되뇐다.
그리움만 쌓이네. 그렇다. 그리움만 쌓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