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야 할 자리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꾼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삶을. 도시의 빽빽한 회색 숲을 벗어나고 싶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늘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바다다. 바람이 불면 풀잎들이 물결치듯 흔들리고, 햇살이 내려앉으면 그 위로 별빛 같은 반짝임이 스며든다. 그 풍경은 늘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듯하다.
초원 위에 서면, 세상은 내 손바닥보다도 작아진다. 발밑 풀잎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작은 합창을 부르고, 바람은 그 노래의 지휘자가 되어 방향마다 다른 멜로디를 만든다. 누구도 지휘하지 않지만, 누구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오케스트라. 새들의 울음소리는 바이올린의 선율 같고, 멀리서 울려오는 종소리는 저음의 콘트라베이스처럼 가슴을 울린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서서, 존재 자체로 한 음이 된다.
도시에선 늘 무겁다. 이름표가 짐이 되고, 직함이 사슬이 된다. 상사의 눈빛에 길을 잃고, 타인의 평가에 흔들린다. 그러나 초원에선 그 모든 게 허물처럼 벗겨진다. 풀잎 하나, 바람 한 줄기, 이름 없는 벌레조차 제 몫의 자리를 당당히 지키는 곳. 그 속에선 나도 더 이상 누구의 역할로 불리지 않는다. 그저 숨 쉬는 존재, 바람을 맞는 존재, 살아 있는 존재일 뿐이다.
어린 시절 TV 속에서만 보던 초원이 있었다. 노랫말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사는 풍경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동화 같았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엔 늘 그 장면이 자리했다. 학교 가는 길, 빌딩 사이로 보이던 좁은 하늘 틈새에도 나는 초원의 이미지를 얹곤 했다. 회색 아스팔트 위로도 언젠가 다시 초록빛이 덮일 거라 믿으며.
성인이 되어 어느 날, 정말 우연히 초원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산 너머 길 없는 길을 따라가다, 시야가 갑자기 열리며 드러난 풍경이었다. 눈앞은 바람에 휘몰아치는 초록의 바다. 그 순간, 나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자유였다. 누구의 허락도, 조건도 필요 없는 자유.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삶의 해방감이 온몸을 채웠다.
초원은 늘 내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리고 있느냐?” 도시에서 바쁘게 발을 굴리며 얻으려는 것들이 과연 진짜 행복인지 묻는다. 풀잎 하나, 작은 벌레조차도 제 빛을 받으며 살아가는데, 나는 빛을 향해 가면서도 정작 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둠 속을 달려왔던 건 아닐까. 초원에서 듣는 그 질문은 뼈아프지만 동시에 눈을 뜨게 한다.
푸른 초원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꿈꾸는 삶의 은유다. 넓고 자유롭고, 누구도 가두지 않는 공간. 누구든 그 위에서 자기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걸을 수 있는 자리. 그곳에선 실패도 상처도 바람에 흩날린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자리. 그래서 초원은 늘 나를 유혹한다. “돌아와라, 여기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다.”
나는 가끔 상상한다. 언젠가 그 초원 위에 작은 집을 짓는 모습을. 아침이면 창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밀려와 커튼을 춤추게 하고, 밤이면 별들이 지붕 위로 흘러내려 은하수를 만든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진 별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생생한 별빛. 그 집에선 화려한 가구나 비싼 장식이 필요 없다. 숨 쉬는 것, 바람맞는 것, 그 자체로 완전하니까.
초원에 앉아 있으면 과거와 미래의 무게가 풀린다. 지나온 길에서 남은 흉터도, 앞으로의 불안도 모두 초록빛 속으로 사라진다. 바람은 위로처럼 불어오고, 새들의 노랫소리는 응원처럼 울린다. 그 순간 나는 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거창하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나와 함께 숨 쉬는 바람 같은 것이라는 걸.
어쩌면 초원은 우리 모두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문명의 무게를 벗고, 욕심의 껍질을 내려놓고,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자리. 그래서 나는 늘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말을 되뇐다. 그것은 단순한 공간의 이름이 아니라, 내 마음이 찾는 안식의 상징이다.
언젠가 다시 그 초원에 서게 될 날을 꿈꾼다. 이름도 직함도 모두 벗고, 오직 나로서 바람과 대화하는 날. 그때 나는 더 이상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초원이 곧 길이자 집이며, 내 영혼이 돌아갈 곳이니까. 그리고 그 초원은, 결국 우리 모두가 언젠가 돌아가야 할 자리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