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복이 곧 부귀영화다
때로는 웃음이 나올 만큼 허무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화려한 무대에 서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부러움을 사는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끝내 하루를 버티고 또다시 내일을 맞이하려 애쓰는 걸까. 돈도 명예도 아닌데, 대체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있는 걸까.
부귀영화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내 삶과는 거리가 멀다. 금빛 샹들리에가 빛나는 홀, 번쩍이는 보석과 고급 승용차, 이름만 대도 아는 사람들의 박수갈채. 그런 장면들은 늘 텔레비전 속,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 같았다. 현실의 나는 늘 평범한 방, 소박한 밥상, 그리고 고단한 일상 속에 있었다. 그래서 종종 스스로를 향해 자조처럼 중얼거린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데 이상하다. 그 말속엔 체념만이 아니라, 묘한 위안이 깃들어 있다. 마치 스스로에게 “괜찮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라고 되뇌는 듯하다.
사람은 모순적인 존재다. 화려한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한 번쯤 누리고 싶다. 어린 시절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며, 내 삶에도 그런 반짝임이 찾아오지 않을까 꿈꿨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빛은 언제나 멀리 있고, 내가 서 있는 곳은 늘 그림자 속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는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작은 것에서 위안을 찾는 법을 배웠다. 부귀영화 대신, 일상의 반짝임을 붙잡는 연습.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삶에도 이미 부귀영화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새벽 공기 속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의 청량함, 카페 창가에 스며들던 오후의 햇살, 고양이가 품에 파고들던 따뜻한 체온. 이런 순간들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누군가 대신해 줄 수도 없다. 그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고유한 부귀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자꾸 남의 기준으로 삶을 평가할까. 누군가는 돈을, 누군가는 권력을, 또 누군가는 명예를 좇는다. 그러나 내가 가진 건 순간이었다. 그것도 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들. 하지만 나는 이제야 안다. 바로 그것들이 내 삶을 지탱하는 진짜 부귀였음을.
사는 건 길다. 하지만 느끼는 건 순간이다. 하루의 대부분은 무미건조하게 흘러가지만, 가슴 깊이 새겨지는 건 찰나의 감정이다. 첫사랑 앞에서 말 한마디 못 하고 돌아서던 밤, 떠나간 이를 배웅하던 새벽의 차가운 공기, 끝내 삼키던 울음이 흘러내리던 고독한 시간. 긴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순간들은 여전히 내 안에 시처럼 남아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나는 이미 수많은 부귀영화를 누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
그럼에도 인간은 늘 흔들린다. 나 또한 부귀영화 따위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불현듯 찾아오는 비교와 박탈감 앞에서는 흔들린다.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며 “저게 인생이지”라는 생각이 스쳐가면, 내 소박한 행복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마음속 목소리가 날 붙잡는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의 삶과 비교하며 내 시간을 낭비하느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나면, 나는 다시 오늘의 작은 행복을 바라볼 수 있다.
어쩌면 부귀영화란, 애초에 남들이 정해놓은 잣대일 뿐이다. 돈 많고, 이름이 알려지고, 화려한 삶을 살아야 부귀라고 불린다. 하지만 나만의 기준에서 보면 다르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 한 끼, 친구의 무심한 안부,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나눈 사소한 대화.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짜 부귀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누리고 있는 셈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작은 것에 집중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깊이 느낀다. 꽃이 피었다 지는 짧은 시간, 계절이 바뀌는 하늘빛, 낯선 이와 나눈 순간의 미소. 이런 장면들은 영화처럼 짧지만, 내 마음엔 오래 남는다.
나는 이제 조금은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허망한 것을 좇으며 살 필요는 없다고. 대신 나는 오늘을 붙잡고 싶다.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오늘 내가 느끼는 감정과 풍경은 확실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작은 위로로 남는다면, 내 인생은 이미 충분히 값지다.
결국 돌아보면, 내 삶은 이미 한 편의 영화다. 화려하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겪은 순간 하나하나가 스크린 위 장면처럼 남아 있다. 울음과 웃음이 교차하는 날들, 실패와 성취가 뒤섞인 발자국, 사랑하고 잃었던 기억들. 그것들이야말로 내 삶을 장식하는 가장 빛나는 장면들이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사는 게 아니라, 이미 내 삶 자체가 가장 소중한 부귀였음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묻는다.
당신에게 부귀영화는 무엇인가. 혹시, 이미 누리고 있는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