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냉기
나는 혐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함부로 판단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타인을 향한 혐오를 볼 때면 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럴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깨달았다.
그 문장 속에 이미 나의 오만이 섞여 있었다는 걸.
나는 혐오의 바깥에 있지 않았다.
그저, 그 안에 있으면서도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세상은 너무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대신 더 큰 소리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다.
이해받기보다 설득하고,
설득이 안 되면 공격했다.
그리고 나도, 그 안에서 조용히 마음을 닫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
그런 사람들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저런 말을 하지?”
그 순간 나는 이미 ‘나와 다른 사람’을 향한 경계를 세웠다.
혐오는 그렇게, 조용히 시작된다.
처음엔 단지 불편함이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쌓이면 감정이 된다.
감정이 커지면 거리감이 생기고,
거리감은 어느새 미움으로 변한다.
나는 나름의 선을 지키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마음속에서 수많은 ‘선’을 긋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지워버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모른 척했다.
마치 그것이 옳은 판단인 양,
조심스럽고 예의 있는 미움은 괜찮다고 합리화했다.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해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하지만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지워버리는 건,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또 다른 폭력이었다.
나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지만,
무관심으로 충분히 잔인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지하철 안에서 어떤 중년 남성이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들 불편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봤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참 민폐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돌렸다.
그런데 문득 그의 말 끝에서 들려온 단어 하나가 내 마음을 멈추게 했다.
“병원.”
그는 병원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목소리는 떨렸고, 말끝마다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부끄러워졌다.
불편함에 눈을 돌리느라,
그의 사정을 보려 하지 않았다.
내가 혐오라고 생각했던 건,
사실 이해하려 하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나는 왜 그렇게 쉽게 단정 지었을까?’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쉽고 빠르다.
이해하려는 일은 어렵고 느리다.
그 느림을 견디기 싫어서 우리는 미워한다.
그건 편리한 감정이다.
즉각적이고 단순해서 부담이 없다.
하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
감정이 식은 게 아니라,
생각이 멈춘 것이다.
나는 이제야 안다.
혐오는 거창한 악의가 아니라,
작은 무관심에서 시작된다는 걸.
그건 뉴스 속 폭력적인 장면이 아니라,
하루의 짧은 대화 속,
눈을 피한 순간들 속에 숨어 있다.
그 사람을 이해할 수도 있었던 단 한 번의 기회를
내가 외면했을 때,
혐오는 그 틈으로 들어왔다.
이해한다는 건,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나와 다른 생각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다름을 미워하지 않는 일,
그게 이해의 시작이라는 걸.
우리는 다름을 견디는 법을 잊었다.
내가 불편하다고 해서,
그가 틀린 건 아니었다.
그건 단지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혐오의 시대란,
이해받지 못한 마음들이 쌓이고 쌓인 시대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점점 더 큰 목소리로 외친다.
그 외침이 무시당할 때마다,
마음은 분노로 변하고,
분노는 혐오로 굳어진다.
그 악순환 속에서 모두가 상처 입는다.
말하는 사람도, 듣지 않는 사람도.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나도 혐오의 일부였다.
타인을 미워하지 않으려는 마음조차,
결국 나의 선 위에서 판단한 감정이었다.
내가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내가 ‘옳은 편’이라는 전제 위에서 만들어진 착각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 바깥에 있다고 믿었지만,
실은 그 안에 있었다.
그래서 이젠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
누군가의 불편한 말을 들을 때,
즉시 반응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말을 잠시 머릿속에 머물게 하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 상상해 본다.
그 짧은 멈춤이,
혐오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 멈춤 안에는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이 들어 있다.
나는 요즘 세상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사람들은 더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그만큼 더 쉽게 갈라진다.
댓글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침묵 하나로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나?”
그 질문은 가끔 나를 괴롭히지만,
그 괴로움 덕분에 여전히 사람을 믿을 수 있다.
혐오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 시대를 끝내는 일은,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선택에서 시작된다는 걸.
누군가의 다름을 미워하지 않기,
불편한 사람의 말에 한 번 더 귀 기울이기,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안의 냉기를 인정하기.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다.
나는 혐오의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완전히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안에서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를 미워하기 전에,
그의 사연을 상상하는 사람.
그의 말 뒤에 있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는 일은 느리고 어렵지만,
그 느림 속에서만 인간의 온도는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그 온도는,
혐오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