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책갈피

다시 펼칠 날을 위하여

by Helia

어떤 마음은 덮어둬야 했다.
너무 아파서, 아니면 너무 사랑해서.
그때마다 나는 마음의 책갈피를 꽂았다.
다시 펼칠 수 있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괜찮음이라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 감정의 회복,
그건 늘 나 혼자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을 때마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다르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다가 멈추고, 천천히 숨을 고른다.
책갈피를 꽂는다.
마음의 어느 지점을 표시하듯이.

그건 단순히 ‘읽던 자리’를 남기는 게 아니다.
그날의 나를, 그 마음의 온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잊지 못한 얼굴이 있다.
아니,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이 있다.
어느 날 문득 커피 향에, 빗소리에, 바람의 방향 하나에도
그 사람이 불쑥 떠오른다.

“잊히는 것도 사랑의 한 형태일까.”
예전에 읽은 문장 하나가 내 안에서 오래 울린다.
그건 누군가의 글이었지만, 동시에 내 마음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마음의 책갈피처럼 꽂았다.
다시 읽지 않으려던 기억 속에, 조용히 표시해 둔 채로.

처음엔 단지 아파서 덮었지만,
지금은 그 아픔마저 나를 만든 문장이라 생각한다.
사랑은 잊히지 않는다.
다만 접어두는 법을 배울 뿐이다.

나는 가끔 책상 서랍을 연다.
그 안에는 오래된 책갈피들이 있다.
사진, 편지, 기차표, 마른 라벤더 한 줄기.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직도 덮이지 않은 마음 하나가 남아 있다.

그 마음은 말한다.
“괜찮아, 아직 덮지 않아도 돼.”

살다 보면 어떤 감정은 ‘정리’되지 않는다.
사과받지 못한 일,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
그리고 이제는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사람.

그럼에도 나는 그 모든 장면에 책갈피를 꽂아둔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으니까.

가끔은 그렇게 멈춰야 한다.
읽던 문장을 덮고, 잠시 숨을 돌리는 일.
마음의 책갈피는 바로 그 쉼의 표시다.

누군가는 말한다.
“지나간 건 그냥 흘려보내면 되지.”
하지만 나는 안다.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걸.

견디기 위해 덮는 것,
그게 나에게는 책갈피다.

책을 덮는 일과 사람을 놓는 일은 닮았다.
둘 다 끝이 아니라 ‘잠시의 멈춤’이니까.

한때 나는 누군가를 미워했다.
그 미움이 오래가면 사랑이 사라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움은 사랑의 그림자였다.
그 사람을 완전히 잊지 못한 채, 나는 여전히 그리워했다.

그래서 마음의 책갈피는 늘 복잡했다.
사랑과 미움, 용서와 후회의 페이지가 엉켜 있었다.

어떤 날엔 그 페이지를 다시 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또 어떤 날엔, 그때의 나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때의 너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
그 말 한마디를 해주기 위해, 나는 책갈피를 뺀다.

그게 용서의 시작이다.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제 정말 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일까?

끝이란 늘 모호하다.
그 사람이 떠나고, 시간이 흘러도
마음 어딘가엔 여전히 잔향이 남는다.

그 잔향이 사라질 때쯤, 나는 깨닫는다.
잊은 게 아니라 익숙해진 것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책갈피를 꽂아둔다.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억 속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어쩌면 인생이란 수많은 책갈피로 이루어진 책일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날, 울던 밤, 웃었던 계절,
그 모든 순간이 한 장 한 장 쌓여
결국 ‘나’라는 이야기로 완성된다.

그중 어떤 페이지는 아직 덮이지 못했다.
어떤 페이지는 이미 오래전에 접혀버렸다.
하지만 모두가 내 이야기다.

나는 그 안에서 자라고, 부서지고, 다시 피어난다.
그게 삶이다.
그게 사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어딘가에서 종이 냄새가 난다.
그건 아직 덮지 못한 기억이 남아 있다는 신호다.
누군가는 그걸 미련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다만, 나를 지켜온 감정의 기록이다.
지워지지 않은 글씨처럼,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흔적.

그 흔적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다.

책을 덮고 나면 남는 건 여백이다.
그 여백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읽는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
아직 덮지 못한 감정,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사람답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의 책갈피를 꽂는다.
다시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서.
그때의 나를, 그 마음의 온도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언젠가 이 페이지를 다시 펼칠 날이 오면,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게 궁금해서, 나는 오늘도 책갈피를 꽂는다.

살아 있다는 건, 여전히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뜻이니까.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오지 않기를,
그 마음이 언젠가 나를 다시 쓰게 하기를.

그리고 그때, 나는 미소 지을 것이다.
아, 이 책갈피는 결국 나를 구하기 위한 표시였구나.

이제 알겠다.
책갈피는 잊지 않기 위한 표시가 아니라,
다시 살아가기 위한 숨이다.
내 마음의 쉼표이자, 사랑의 흔적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나의 마음 위에 또 하나의 책갈피를 꽂는다.
그 페이지가 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 “마음의 책갈피는 잊지 않기 위해 꽂는 게 아니다.
언젠가 다시 사랑하기 위해,
나를 잃지 않기 위해 꽂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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