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둘 자리가 없는 마음
책장도 있고, 서랍장도 있다. 책상도, 침대도 제자리에 있다.
그런데 옷장이랑 피아노만 둘 자리가 없다.
이상하다. 다 갖춘 듯한데 늘 비어 있다.
나는 원래 큰 방을 좋아한다.
넓은 벽과 높은 천장, 햇살이 쏟아지는 커다란 창문.
그런 공간에서라면 나도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여유롭고, 단정하고, 매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반짝일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늘 작았다.
발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벽, 문을 열면 금세 막히는 공간.
그 안에서 나는 몸을 줄이고 마음을 접어가며 살아왔다.
좁은 방은 내게 많은 걸 가르쳤다.
공간은 작지만, 감정은 자주 넘쳤다.
책상 위에 쌓인 종이 더미가 마치 내 마음 같았다.
버리지 못한 말들, 미뤄둔 꿈들, 한숨처럼 쌓인 흔적들.
정리하지 못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방은 점점 더 좁아졌다.
가끔은 생각한다.
나는 이 작은 방 안에서 얼마나 많은 걸 욕심냈던가.
책장을 두고 싶었고, 서랍장을 버리기 싫었고, 침대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무엇을 더 가지느냐보다 무엇을 비우느냐가 중요한데,
나는 자꾸 쌓기만 했다.
그래서 공간보다 마음이 먼저 막혀버렸다.
좁은 방은 나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조금만 걸어도 부딪히고, 조금만 생각해도 넘쳐흐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종종 이 방 안에서 나를 정리한다.
낡은 노트를 버리고, 책 더미를 쌓은 자리에 숨을 놓는다.
공간이 비워질 때마다 마음도 조금씩 환해진다.
어쩌면 이 방은 내 마음의 구조와 닮았다.
겉으로는 잘 정리된 것 같지만, 구석구석에 미처 닿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다.
사람의 마음도 방처럼 빛이 잘 드는 면이 있고,
늘 어둑한 구석이 있다.
나는 그늘진 구석을 정리하지 못해
오래된 감정이 먼지처럼 쌓여 있다.
좁은 방은 나를 가두는 동시에 지켜준다.
세상의 소음이 벽을 넘지 못하고,
밖의 시선이 내게 닿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 이 방은 성이 된다.
작지만 안전한 요새, 누구도 허락받지 않고 들어올 수 없는 공간.
나는 그 안에서 나를 단단히 묶고, 다시 풀어낸다.
그러다 문득 창문을 연다.
바람이 밀려 들어오며 커튼이 흔들린다.
그 찰나의 움직임에 방이 갑자기 넓어진 듯 느껴진다.
빛이 한 줄기 들어올 뿐인데,
숨이 트이고 마음이 확장된다.
어쩌면 좁은 방이 문제가 아니라
닫힌 창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피아노를 상상한다.
이 방에 피아노가 있다면,
그 소리는 벽을 타고 어디까지 닿을까.
작은 울림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그 진동이 내 하루의 공기를 바꿀 것 같다.
하지만 피아노를 들이기엔 자리가 없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음악을 두지 못한 방처럼,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 같다.
그래도 나는 이 방을 사랑한다.
좁지만, 나의 모든 계절이 이 안을 지나갔다.
눈물로 젖은 새벽도, 웃으며 잠든 밤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다시 혼자 일어섰던 날들.
그 모든 시간의 냄새가 벽에 스며 있다.
좁은 만큼, 깊다.
언젠가 친구가 내 방에 와서 말했다.
“생각보다 아늑하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피아노 둘 자리는 없지.”
그 말이 왜 그렇게 오래 남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단순히 물건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삶에서 내가 아직 놓지 못한 것,
가지지 못한 것,
그 사이의 여백을 말하는 것 같았다.
좁은 방에 살면,
자연스레 욕심이 줄어든다.
버리는 법을 배우고,
비우는 순간의 가벼움을 알게 된다.
한때는 그것이 결핍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자유라는 걸 안다.
좁은 방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 때마다,
그 불편함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밤이 깊어지면, 방은 더 작아진다.
어둠이 벽을 따라 천천히 내려앉고,
나는 그 안에서 천장을 바라본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그 가까움이 답답하기도,
어쩐지 안심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품처럼,
작지만 온기가 남아 있는 공간.
나는 여전히 넓은 방을 꿈꾼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피아노를 두고도 여유가 있는 공간.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방이 내 삶의 목표가 아니라,
마음을 비추는 은유라는 걸.
좁은 방이 있기에
나는 넓은 세상을 꿈꿀 수 있었다.
결핍은 늘 상상력을 낳는다.
아침이면 커튼을 걷는다.
햇살이 책상 위를 스치고,
책장에 쌓인 먼지들이 빛에 반짝인다.
그 반짝임이 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커피 향이 퍼지고,
좁은 방이 한순간 넓어진다.
공간은 그대로인데,
내 마음이 확장되는 순간이다.
좁은 방은 내 우주다.
크기로 재면 작지만,
기억으로 채우면 끝이 없다.
그 안에는 나의 하루, 나의 계절, 나의 시간들이
작은 별처럼 빛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울고 웃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섰다.
그래서 이 좁은 방은,
결국 나 자신이다.
언젠가 피아노를 들일 수 있는 방으로 이사하더라도
나는 이곳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좁은 방에서 나는 가장 많은 것을 잃고,
가장 많은 것을 얻었다.
불편함 속에서 편안함을 배우고,
결핍 속에서 충만을 배웠다.
좁은 방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를 이렇게 오래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도 좁은 방은 조용히 나를 감싼다.
바깥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곳은 나를 품는 작은 우주다.
책상 위의 조명이 낮게 빛나고,
커튼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피아노를 둘 자리는 없지만,
대신 내 마음에 음악이 흐른다.
그 소리는 벽을 넘어,
세상 어딘가로 천천히 번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