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한 마음의 끝에서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안 될 밤이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들이키며,
쓴맛으로 마음의 구멍을 막아보려 했다.
사방은 고요했고, 어둠은 내 편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답하지 않는 시간.
그 적막이 이상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속이 뜨거워졌다.
뜨거운 건 술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취하고 싶었다.
완전히 무너져도 괜찮은 밤이기를 바랐다.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지점까지 가고 싶었다.
“오늘만큼은 괜찮아.”
그 말로 스스로를 속이며 또 한 잔을 들이켰다.
술이란 건 결국 핑계다.
기억을 지우려는 척하면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불러온다.
한 모금마다 지난 시간들이 들이닥친다.
희미했던 얼굴, 끝내 삼키지 못한 말,
지나간 날들이 불빛처럼 번쩍이며 머릿속을 스친다.
기억은 그렇게, 취기가 도는 순간 되살아난다.
잊으려는 마음과 기억하려는 마음이 한자리에 앉는 밤.
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커튼이 느릿하게 흔들리고, 불빛이 잔 위로 떨어졌다.
그 빛 속에서 내 표정이 낯설게 비쳤다.
외로워서 웃고, 아파서 웃고, 웃다가 울었다.
“괜찮아.”
그 말을 속삭이며 잔을 기울였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위로도 필요 없었다.
쓸쓸함이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친구 같았다.
술잔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모양이 꼭 내 마음 같았다.
붙잡으려 하면 흘러내리고,
내려놓으면 더 깊게 스며드는 그런 마음.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
잊고 싶다고 말하면서, 잊히지 않길 바란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매번 나를 흔들어 놓는다.
창밖 불빛들이 물 위의 별처럼 흔들렸다.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깜박이고,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취한 건지, 생각에 잠긴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밤엔 말보다 침묵이 더 솔직하다.
술기운이 도는 머릿속에서 오래 전의 그 사람이 떠올랐다.
나를 웃게 했던 얼굴, 나를 떠났던 뒷모습.
그리움은 늘 이렇게 불쑥 찾아온다.
이미 끝난 이야기인데도, 여전히 내 안에 살고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마음은 기억한다.
마음은 언제나 기억을 놓지 않는다.
“미워하면서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이 술잔에 번져 흐려졌다.
나는 그 사람을 잊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아니었다.
기억 속에서 수없이 지웠다가 다시 썼다.
술에 취하면 그 이름이 더 또렷해졌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지우려 하면 더 선명해지고,
도망치려 하면 더 다가온다.
술은 마음의 거울이다.
속이 들여다보인다.
비워야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오늘은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잊지 못한 마음도, 흉처럼 남은 기억도.
지워지지 않는 건, 여전히 사랑이 남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새벽이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내 안은 묘하게 따뜻했다.
슬픔은 식었고, 생각은 조금 고요해졌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밤을 한 번쯤 겪는다.
취한 척 웃다가, 웃음 사이로 울음을 삼키는 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시간.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을 위로해야 하는 시간.
“오늘만은, 무너져도 괜찮다.”
짧은 문장이 내 안에서 천천히 번졌다.
이유도 모른 채 견디는 날들이,
이런 밤에야 비로소 내게 말을 걸어왔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그건 술보다 진한 위로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맨 정신으로 버티는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가끔은 취해야 한다.
마음이 너무 또렷하면, 세상이 너무 잔인하니까.
술은 도망이 아니라 휴식이다.
세상과 나 사이의 잠깐의 완충지대.
그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숨을 쉰다.
취한 밤은 솔직하다.
감춰왔던 말들이 고요 속에 흘러나온다.
누구도 듣지 않지만, 그래서 더 진실하다.
“나, 아직 사랑하고 있어.”
그 말을 꺼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부끄럽지 않았다.
사랑이란 원래 그렇게 불완전한 것이다.
완전히 끝나야만 잊히는 게 아니니까.
빈 잔을 바라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눈앞이 흐릿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맑았다.
그리움이 술처럼 부드럽게 번졌다.
아픔이 투명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조금 단단해진다.
슬픔은 잔의 바닥처럼 맑고 깊었다.
그 안에는 아직도 내가 있었다.
밖은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 공기 속엔 어제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불빛이 꺼진 거리 위로, 내 그림자만 길게 늘어졌다.
취기는 가셨지만, 마음은 아직도 흔들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흔들림조차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모든 건 사라지겠지만, 이 마음만은 잠시 남길 수 있기를.
모든 밤은 결국 아침이 된다.
하지만 이 취한 밤만은, 조금 더 머물렀으면 했다.
완전히 깨어나기 전의 순간,
그 잠시의 몽롱함이 오히려 나를 살리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고,
잊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늘만큼은 취한 나로 살아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