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가고, 겨울이 바짝 쫓아온다

내 안에서 먼저 바뀌는 계절

by Helia

여름이 가고, 겨울이 바짝 쫓아온다.
그 사이에 가을은 없었다.
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워서 부채질을 하던 나였는데, 이제는 바람 한 줄기도 따갑다. 피부가 예민해진 탓이다. 모낭염이 뒤집히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햇빛조차 닿기 두려워 커튼을 내린 채 지낸다. 사람들은 창가에 앉아 라테를 마신다지만, 나는 방 안 구석에서 약 냄새와 함께 하루를 버틴다. 계절이 바뀌는 게 아니라, 내 피부가 먼저 계절을 알아채는 기분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팔이었다.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선풍기 앞에 앉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손끝이 차갑다. 전기장판을 켜려다 멈춘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불속으로 몸을 파묻는다. 기온이 내려가니 마음도 함께 수축한다. 여름엔 아무렇지 않게 거울을 보며 웃던 나였는데, 요즘은 거울 앞에 서는 게 두렵다. 얼굴에 번진 붉은 자국들, 손끝으로 닿는 오돌토돌한 감촉이 낯설다.

비가 자주 내린다. 그 비는 마치 계절의 문턱을 닦아내는 듯하다. 여름의 먼지를 씻어내고, 겨울의 냉기를 데려온다. 나는 그 비를 창문 너머로만 본다. 바깥공기가 닿으면 상처가 더 심해질까 봐. 피부뿐 아니라 마음까지 실내에 갇혀 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코트를 꺼내 입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계절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계절은 아직 멈춰 있다. 방 안 공기는 여름의 잔열과 겨울의 냉기가 동시에 머문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세수를 한다. 손끝에 닿는 미지근한 물이 유일하게 편안하다. 물의 온도는 늘 정확하다. 차지도 덥지도 않다. 그 중간의 온도가 지금의 나와 닮았다.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냉기 사이에 머무는, 아직 미완의 계절. 세수를 마치고 크림을 바를 때면 코끝에 약한 화학 냄새가 맴돈다. 그 냄새 속에 희미하게 스며 있는 ‘회복’의 기분이 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몸이 작게 속삭인다.

밖에 나가지 못한 지 며칠째인지 모른다. 대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소리들이 세상을 대신한다. 자동차 소리, 개 짖는 소리, 누군가 웃는 소리. 그 사이로 바람이 스친다. 바람의 냄새만으로 계절을 알아챈다. 여름의 바람은 달콤했는데, 지금의 바람은 금속 같다. 차갑고, 뚜렷하고, 단단하다. 그 냄새가 방 안까지 스며들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바깥은 겨울을 준비하는데, 나는 아직 여름의 온도에 머물러 있다.

하루 종일 집 안에 있다 보면 시간 감각이 흐릿해진다. 햇빛이 들지 않으니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하다. 커튼을 조금 열면 희미한 빛이 들어오지만, 그마저도 눈이 시려 오래 보지 못한다. 햇빛이 이렇게 날카로운 것이었나. 따뜻함의 상징이었던 빛이 이제는 칼날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반짝일수록 내 방은 더 어두워진다. 밖에서는 낙엽이 떨어지고, 나는 그 낙엽의 그림자만 벽에 비친 채로 본다.

피부가 뒤집힌 건 단순한 트러블이 아니라, 신호 같았다. 조금 쉬라는, 멈추라는 신호. 여름 내내 쏟아지는 태양 아래에서 버티던 몸이 이제는 제 속도를 찾으려 하는 것 같다. 나는 오랜만에 나를 돌본다. 약을 바르고, 물을 마시고, 얇은 수건으로 얼굴을 덮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누군가 보기엔 지루한 시간일지 모르지만, 내겐 이게 회복의 과정이다. 계절이 바뀌듯, 몸도 제 계절을 통과하고 있다.

밤이 되면 소리가 줄어든다. 그 정적 속에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가끔 거울을 보며 “그래도 괜찮아지고 있잖아” 하고 중얼거린다. 얼굴의 붉은 기운이 약간 옅어질 때면 계절이 한 발짝 더 이동한 것 같다. 어쩌면 내 몸이 겨울로 가기 전에 먼저 회복의 가을을 건너는 지도 모른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도, 내 몸은 나름의 속도로 계절을 통과하고 있다.

차가운 물컵을 손에 쥔다. 물이 손끝에서 미끄러진다. 유리의 차가움이 뼛 속까지 스며드는 듯하다. 예전엔 이 감각이 싫었는데, 지금은 이게 오히려 좋다. 확실한 온도, 명확한 감촉. 세상이 여전히 내 곁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여름의 뜨거운 공기도, 겨울의 차가운 바람도 내게 다 닿을 수는 없지만, 이 한 모금의 물로도 충분히 계절을 느낀다.

밖에서는 아마 낙엽이 다 떨어졌을 것이다. 단풍은 피기도 전에 젖었을 테고, 가을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만 잠깐 머물다 사라졌겠지. 창밖의 풍경은 모르지만, 내 안의 계절은 분명 바뀌었다. 아침마다 약을 바르고, 밤마다 거울을 닦아내며 나는 천천히 여름을 보내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피부에 먼저 찾아오고, 마음은 그 뒤를 따른다.

요즘은 세수 후 물기 남은 얼굴에 손바람을 일으키며 생각한다. “나는 아직 여름과 겨울 사이에 있다.” 여름은 나를 지치게 했고, 겨울은 아직 나를 완전히 감싸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따가움도 이 시림도 모두 지나가겠지. 그리고 그때쯤이면 나도 조금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건 늘 외부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게 내 안에서 일어난다. 바깥의 바람보다, 내 안의 온도가 먼저 바뀌고 있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바짝 쫓아온다. 그 사이에 나는 있다. 햇빛을 피하며, 바람을 닫으며, 내 안의 계절을 견디는 중이다. 언젠가 다시 창가에 앉을 수 있을 만큼, 얼굴이 회복되고 마음이 조금 더 밝아지면, 그때는 차가운 바람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은 그저, 이 방 안의 온도를 지키는 중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