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물이 식기 전에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겠다고 다짐한 밤,
결국 뜯고 만 게 컵라면이었다.
배가 고팠다기보다, 마음이 허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고, 서랍을 뒤지고, 결국 손에 남은 건 익숙한 원통형 컵 하나였다.
그때의 컵라면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물 주전자에 불을 올리는 동안, 나는 오늘 하루를 되감는다.
기분 나쁜 일도, 애써 참은 말도, 남이 아닌 내 탓 같았던 순간들도.
끓는 물의 소리는 마치 마음속에서 뭔가 부글거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뚜껑을 반쯤 열고 수프를 털어 넣는다.
빨간 가루가 흩날리며 공기를 매운 냄새로 물들인다.
그 냄새는 이미 위로의 전조다.
엄마는 늘 신라면을 고집했다.
“그게 진짜 라면이지. 국물이 시원해야지.”
엄마의 라면은 늘 냄비에서 끓었다.
끓기 전에는 꼭 파를 썰고, 달걀을 톡 깨 넣고, 한쪽에 김치를 꺼내놓는 의식이 있었다.
그 정성은 언제나 ‘누군가를 위해’였다.
반면 내 라면은 컵 안에서 익는다.
뜨거운 물 한 컵이면 충분하다.
그건 철저히 ‘나를 위해’ 존재한다.
엄마의 라면엔 가족이 있고, 내 라면엔 혼자가 있다.
세대의 차이라기보다,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 같다.
육개장 사발면은 내게 유년기의 냄새다.
할머니 댁 마루에서 비 오는 날 먹던 소고깃국의 맛,
그걸 닮은 듯해 자꾸 손이 간다.
엄마는 “그건 싱겁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난 그 순한 국물에서 오래된 안심을 느낀다.
누군가의 기준에는 밍밍하겠지만, 내겐 그게 좋다.
세상 모든 ‘순함’은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한 부드러움일지도 모르니까.
컵라면은 기다림의 음식이다.
단 세 분이면 된다고 하지만, 그 세 분은 묘하게 길다.
김이 피어오르는 동안 젓가락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고, 시계를 보고,
뚜껑을 살짝 열었다 닫으며 조바심을 낸다.
그 짧은 기다림 속에서 사람들은 의외로 많은 걸 생각한다.
오늘 하루를 후회하거나, 내일의 계획을 세우거나,
혹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면발이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인스턴트라 불리지만, 컵라면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숨어 있다.
빠르게 끓이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건 마치 ‘인생의 미니어처’ 같다.
짧지만 그 안에 모든 온도와 시간이 다 들어 있다.
컵라면을 먹을 때는 혼자가 좋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묘하게 덜 맛있다.
말을 나누면 김이 식는다.
라면의 뜨거움은 침묵 속에서 가장 진하다.
젓가락이 스치는 소리, 국물이 삼켜지는 소리,
그 단순한 리듬이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고요한 밤, 방 안의 공기가 나 혼자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지만,
그 외로움조차 컵라면의 김 속에서 따뜻하게 변한다.
컵라면의 면발은 참 사람 같다.
처음엔 딱딱하고 냉정하다가, 뜨거운 물을 만나면 부드러워진다.
열에 녹아내리며 유연해지는 그 모습이,
마치 마음이 풀리는 과정과 닮았다.
삶도 그렇다.
차가운 날엔 아무리 다가와도 마음이 펴지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온기 하나에 녹아버린다.
그 짧은 순간의 온도가 우리를 살린다.
컵라면은 유혹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특히 밤 12시, 세상이 잠든 시간에 피어오르는 그 냄새는 반칙이다.
책상 위의 컵, 희미한 조명,
그 속에서 김이 흘러나오며 공기를 흐린다.
그 냄새를 맡으면 사람은 무너진다.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반응한다.
그건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다.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뜨거운 증거.
한때 나는 컵라면으로 밤을 버텼다.
실연의 밤, 누구에게도 전화할 수 없던 시간,
편의점 불빛 아래 서서 조그만 플라스틱 컵을 들고 서 있었다.
“뜨거운 물은 저쪽이에요.”
점원이 가리킨 온수기에서 흘러나온 김이 내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김과 섞여 흘러내렸다.
그날의 국물은 눈물보다 짰고, 면발은 심장보다 뜨거웠다.
하지만 그 뜨거움이 내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그날 이후로 컵라면은 내게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존식’이 되었다.
컵라면은 누군가에겐 간식이지만, 누군가에겐 하루를 견디는 법이다.
자취방 한쪽 구석에 쌓인 컵라면들은 일종의 안심보험이다.
돈이 떨어져도, 힘이 빠져도,
그 하나면 ‘오늘’은 버틸 수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잔혹하지만,
컵라면은 늘 상온에서 나를 기다려준다.
뜨거운 물만 있으면 된다.
그 간단함이 때론 사람보다 든든하다.
엄마는 여전히 신라면을 끓인다.
“이건 컵에선 절대 이 맛 안 나와.”
엄마의 말은 맞다.
컵라면의 국물은 얇다.
하지만 그 얇음 속에 나는 나만의 맛을 찾았다.
엄마의 라면이 누군가를 위한 정성이라면,
내 컵라면은 나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애정이다.
누군가를 위해 차려진 식탁 대신,
나 자신에게 허락한 작고 뜨거운 온기.
그게 컵라면의 본질이다.
컵라면을 먹다 보면 이상하게도 인생이 겹쳐 보인다.
3분이면 완성되지만, 식는 데는 금세다.
사람의 관계도 그렇다.
끓기 전엔 조마조마하고, 끓고 나면 뜨겁고,
조금만 지나면 미지근해진다.
그 사이에서 우린 늘 후회한다.
조금 더 기다릴 걸,
조금 덜 뜨겁게 먹을 걸.
하지만 인생도 컵라면처럼 다시 끓일 순 없다.
식으면 그게 끝이다.
그래서 사람은 뜨거운 동안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그 뜨거움을 기억하며 산다.
편의점에서 낯선 사람과 나란히 컵라면을 먹을 때가 있다.
말 한마디 섞지 않아도 묘한 온기가 흐른다.
젓가락질의 박자, 국물 마시는 소리,
그 짧은 동행 속에서 서로의 고단함이 전해진다.
이건 음식이 아니라 ‘온도 공유’다.
세상에 홀로 버티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같은 온도에 머무는 시간.
그게 컵라면의 기적이다.
컵라면이 다 불기 전에 국물 한 모금 들이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열기가 심장까지 닿는다.
그 뜨거움이 오늘의 허무를 녹인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빈 컵만 남았다.
하지만 그 공허함마저 이상하게 따뜻하다.
우린 결국 식지 않으려 애쓰는 존재들이니까.
뜨거운 물이 식기 전에,
사랑도, 꿈도, 나 자신도 다시 한번 데워본다.
그 짧은 3분이 내 삶을 다시 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