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대

멀리서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by Helia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봄이었다.
햇살은 유리난간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바람은 내 머리카락 끝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날, 나는 전망대에 서 있었다.
그 풍경은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고요한 오후였을 것이다.

전망대에 오르기 전,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발밑의 돌계단은 오래된 시간처럼 울퉁불퉁했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정확히 뭘 보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조금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때가 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 오르는 순간.
그날의 나는 그 이유도 모른 채, 그저 하늘 가까이로 걸었다.

마침내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멀리 도시의 윤곽이 흐릿하게 깔리고, 강물이 유리처럼 반짝였다.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연둣빛 물결을 만들었다.
그 풍경이 너무 예뻐서 숨을 고르던 것도 잊었다.
그때의 나는, 그저 ‘있었다’.
그 존재감 하나로 충분했다.

전망대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곳이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날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쪽 도시가 너무 작아 보였다.
건물, 사람, 차, 그 모든 것이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는 분명 나도 있었다.
어딘가의 건물 안, 혹은 저 거리 어딘가에서 분주하게 살고 있을 또 다른 나.
그 모습을 상상하니 묘한 이질감이 밀려왔다.
그 작은 세계 속에서 나는 늘 무언가에 쫓기며 살았는데,
이곳에서는 모든 게 멀고 조용했다.
‘괜찮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괜찮아.’
바람이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한 점 구름이 바람에 떠밀리듯 흘러갔다.
햇살은 투명했고, 공기는 달콤했다.
봄날의 공기엔 묘한 온도가 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그 중간.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온도.
나는 그 공기 속에서 오래 숨을 쉬었다.
그건 마치, 삶의 한 페이지를 통째로 마시고 있는 기분이었다.

전망대에서 보는 세상은 다르다.
아래에서는 복잡했던 일들이 한눈에 정리된다.
도시는 작고, 사람은 점이다.
그 점들이 움직이며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그 흐름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던 일들도 결국 그 수많은 점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멀리서 보면, 모든 건 단순해진다.
그 단순함이 위로였다.

멀리서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까이선 상처였지만, 멀리서 보니 풍경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인생이란 게 ‘전망의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를 너무 가까이서 보면 아프고,
너무 멀리서 보면 그리워진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모든 게 아름다워진다.

그날 나는 혼자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바람, 햇살, 풍경이 모두 내 편이었다.
누구와도 말하지 않아도,
세상과 완벽히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 있음이 완성처럼 느껴졌던 시간.
그런 순간은 인생에 몇 번 없다.

전망대 아래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빨간 지붕들이 이어지고, 흰 연기가 구불거리며 하늘로 올랐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개미처럼 작았다.
그 작음이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는 그 모습들이,
거대한 그림 속 점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세상은 혼란스러워도, 멀리서 보면 늘 하나의 질서를 품고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는 지난 시간들이 섞여 있었다.
어떤 날은 후회로, 어떤 날은 미련으로, 어떤 날은 그리움으로 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바람은 다정했다.
마치 나를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바람을 맞으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이제 좀 괜찮을지도 몰라.’

그 후로도 나는 여러 전망대를 찾았다.
도시의 꼭대기, 바다 위의 데크, 산 정상의 유리 전망대.
올라갈 때마다 조금씩 다른 감정을 느꼈다.
누구와 함께 오르면 풍경이 배경이 되었고,
혼자 오르면 풍경이 이야기로 변했다.
사람이 바뀌어도, 풍경은 늘 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매번 다른 나를 비추어주었다.
전망대는 결국 거울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수없이 나를 마주했다.

어느 날은 노을 속 전망대에 섰다.
하늘은 붉게 물들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해가 넘어가는 경계선 위에서 세상은 잠시 멈춘 듯했다.
그 순간, 마음이 묘하게 조용해졌다.
빛과 어둠이 섞이는 그 짧은 틈,
삶의 의미란 게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은,
불완전함이 아름다운 시간.

그날의 전망대에서 본 세상은
완벽하게 정돈된 풍경이 아니었다.
어딘가 덜 정리된 도시,
비틀린 길,
그 위를 천천히 걷는 사람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좋았다.
그건 마치 나 자신 같았다.
엉켜 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모양.
바람에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 나무처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삶에도 이런 전망대가 있으면 좋겠다고.
한참을 걸어 올라온 뒤,
뒤돌아보며 “아,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웃을 수 있는 자리.
후회도, 미련도 잠시 내려놓고,
그저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
그게 인생의 진짜 ‘전망대’ 아닐까.

이제 나는 굳이 높은 곳을 찾지 않아도 안다.
창가에 서서도, 버스 창문을 통해서도,
마음만 열면 세상은 언제든 달리 보인다는 걸.
전망대는 결국 마음의 높이였다.
마음이 닫히면 세상은 벽이 되고,
마음이 열리면 어디서든 하늘이 된다.

봄이 오면 나는 여전히 그날의 전망대를 떠올린다.
햇살이 유리 위를 미끄러지고, 바람이 살결을 스칠 때면,
그날의 공기와 온도가 다시 피어난다.
참 예뻤지, 그날의 봄.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봄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또 다른 전망대에 서게 된다면,
그때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곳에서 본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