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지나가는 빛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차가웠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겨울 끝자락의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중학교 3학년, 세상에서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은 해였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그 어정쩡한 나이에, 세상은 너무 빠르게 달리고 나는 자꾸만 뒤처졌다. 교실 안은 늘 시끄러웠지만, 내 마음은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나를 봐주길 바랐다.
그날 밤, 창문 밖으로 기침 섞인 바람이 스며들었다.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걷어차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마을의 가로등 몇 개가 꺼져 있었고, 하늘은 믿기 힘들 만큼 선명했다. 검은 유리 위에 흩뿌려진 별들이 반짝였고,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이렇게 넓다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하늘 한쪽에서 한 줄기 빛이 스쳤다. 너무 빨라서, ‘봤다’보다 ‘사라졌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는 숨을 삼키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별똥별이야...”
작게 중얼거린 그 말이 공기 중에서 얼어붙었다. 그 순간, 마치 누군가 나를 위해 불을 켠 것처럼 세상이 잠시 밝아졌다. 나는 믿었다. 그 빛에 내 소원을 실으면, 지금의 나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급히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게 해 주세요.’ 그게 내가 빌 수 있는 유일한 소원이자, 절박함의 전부였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힘들었다. 하루하루가 버거웠고, 숨을 쉬는 일조차 고역이었다. 학교에서는 늘 웃는 척을 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미안하다고 말했고, 이유 없이 혼이 나도 고개를 숙였다. 세상은 불공평했고,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감정의 무게가 너무 커서,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지금 이 시간이 끝나면, 언젠가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유성에게 말했다.
“빨리, 지나가게 해 줘.”
그 말은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달래는 주문 같았다.
그 이후로 밤하늘을 자주 보게 됐다. 어두운 하늘은 나에게 유일한 위로였다. 친구도, 가족도 이해하지 못하던 마음을 별들은 묵묵히 들어줬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또 하나의 빛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 한 줄기 빛이 내 절망을 데려가주길 바랐다. 하지만 유성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나는 조금씩 변했다. 세상이 여전히 버겁지만, 그 버거움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시간은, 내가 그렇게 원하던 대로 흘러갔다.
중학생이던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다음엔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지나온 해들을 돌아보면, 그때 빌었던 소원이 천천히 이루어졌다는 걸 깨닫는다. 정말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잃기도 하고, 얻기도 했다. 미워하던 일들이 사소해지고, 절망이었던 날들이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느 밤, 성인이 된 나는 우연히 유성을 다시 보았다.
오랜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한 줄기 빛이 고요히 스쳤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10년 전 그 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눈물이 맺혔다.
‘나,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그때 빌었던 소원은 이루어졌다.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어릴 때는 몰랐다.
유성이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그 소원이 버틸 힘이 되어준다는 걸.
그 한 줄기 빛을 본 나는 그날 이후로 버텼고, 견뎠고, 오늘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유성은 기적이 아니라 ‘기억’이다. 내가 가장 힘들던 순간, 하늘은 나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유성이 단지 자연 현상이겠지만, 나에겐 삶의 증거다.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밤에도, 하늘은 단 한 줄기 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괜찮다. 너는 지나가고 있다.’ 그 말이 내게는 기도보다도 큰 위로였다.
지금도 가끔 하늘을 본다.
삶이 벅차고, 마음이 시들어갈 때면,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학교 운동장 옆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여중생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너무 작아서, 너무 여려서, 세상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던 그 아이. 그 아이가 바라본 유성의 빛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는 알겠다. 유성은 ‘사라지는 별’이 아니라, ‘지나가는 시간의 불꽃’이라는 걸.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을 닮았다. 누구도 영원히 빛날 수 없지만, 잠깐이라도 뜨겁게 존재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타오르다 사라지는 동안 남긴 흔적이, 누군가의 하늘을 밝힌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유성에게 소원을 빌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 힘들어할 때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지나가. 그게 가장 큰 선물이야.”
그 말 안에는 열다섯 살의 내가, 별똥별을 보며 울던 그 밤의 내가 담겨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별이 있지만, 내게 가장 빛나는 별은 그날 떨어진 하나의 유성이다. 그건 짧았지만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나는 여전히 그 빛을 믿는다. 언젠가 또 다른 어둠 속에서 길을 잃더라도, 하늘 어딘가엔 내 소원이 타오르고 있을 테니까.
그 밤의 절박함은 이제 다만 부드러운 기억이 되었다. 빛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건 어둠이지만, 그 어둠은 두렵지 않다. 나는 그 안에서 유성을 봤고, 살아남았으니까.
오늘도 창문을 연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진 하늘이지만, 나는 그 위를 안다. 언젠가, 다시 한 줄기 빛이 흐를 것이다. 그때 나는 다시 조용히 속삭일 것이다.
“고마워. 너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