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나
나는 한때 모든 걸 불태웠다. 사랑도, 믿음도, 나 자신조차도. 불길은 뜨거웠고, 그 뜨거움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착각을 했다. 그러나 모든 불은 결국 꺼지기 마련이었다. 남은 건 재뿐이었다. 손끝으로 만지면 가볍게 흩어지는 잿빛 조각들. 그 속에 내 지난 시간들이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재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살게 했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건 언제나 재다. 사람들은 그것을 끝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불타버린 자리 위에서 나는 새로운 꽃을 보았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도, 회색빛 잿더미를 뚫고 노란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 작고 단단한 생명을 마주했을 때, 내 안의 어떤 문이 열렸다. 무너진 것도 다시 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의 문이었다.
사람의 마음도 불길처럼 타오른다. 한순간의 열정으로 세상을 다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꺼져버린다. 그리고 남는 건 무너진 자존심, 식어버린 감정, 닫힌 문들. 하지만 그 잿더미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미세한 열이 있다. 바로 다시 시작할 용기다.
나는 그 용기를 믿기로 했다. 타버린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그 위에 서기로 했다. 마치 재를 양분 삼아 자라는 새싹처럼. 처음에는 힘들었다. 모든 게 사라진 것 같았고, 아무리 걸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 안의 재가 흙으로 변해갔다. 그 흙 위에 새로운 나를 심었다.
삶이란 어쩌면 그 재와 꽃의 순환일지도 모른다. 한 번 타오르고, 무너지고, 다시 피어나는 일. 반복되는 듯하지만, 그 과정마다 피어나는 꽃은 조금씩 다르다. 예전의 나는 불처럼 치열했지만, 지금의 나는 꽃처럼 단단하다. 불은 순간의 열로 빛나지만, 꽃은 오랜 기다림으로 피어난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나는 수없이 무너졌다. 실패하고, 버려지고, 오해받고, 사랑에 지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모든 시간이 내 뿌리를 깊게 내렸다. 아픔이 많을수록, 꽃은 더 깊이 피어난다. 재가 많을수록, 흙은 더 비옥해진다. 결국 모든 상처는 나를 살게 하는 양분이었다.
어느 봄날이었다.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이 김도 언젠가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 순간 깨달았다. 사라진다고 해서, 없어진 건 아니라고. 증발된 김은 공기 속에서 또 다른 형태로 남는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진 않는다. 우리의 기억도, 사랑도, 상처도 그렇다. 다만 모양을 바꿀 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불타는 시간도, 꺼진 시간도 모두 삶의 일부였다. 불이 지나간 자리는 비어 보이지만, 그 빈자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빈 잔에 물이 채워지듯, 텅 빈 마음에도 언젠가 새로운 감정이 스며든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불타던 사랑이 식고, 남은 재만 보일 때면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재 속에서 다시 피어난 사랑은 이전보다 조용했다. 불길이 아닌 햇살 같았다. 뜨겁지 않지만 따뜻했고, 오래 머물렀다. 진짜 사랑은 타는 게 아니라, 피어나는 거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재를 품고 산다. 실패한 꿈, 지나간 인연, 잃어버린 믿음. 하지만 그 재가 바로 새로운 시작의 흙이 된다. 재는 무너짐의 증거이지만, 동시에 회복의 전조다. 나는 이제야 안다. 타버린 자리에서도 꽃은 핀다는 것을.
불교의 ‘무상’이라는 말처럼,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말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건, 다시 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아무리 깊은 어둠이라도, 새벽은 온다. 아무리 완전히 무너진 자리라도, 봄은 피어난다.
나는 내 안의 재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살아온 증거이자, 다시 피어나기 위한 토양이다. 실패한 일들도, 끝난 사랑들도, 흩어진 꿈들도 이제는 고맙다. 그 모든 불길이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으니까.
가끔은 불타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뜨거웠던 만큼 고통도 깊었지만, 그만큼 살아 있다는 실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안다. 불꽃보다 더 오래가는 건, 꽃이다. 꽃은 조용히 피어나지만, 그 향기는 불길보다 멀리 퍼진다.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재 위를 걷는다. 발끝마다 바스러지는 과거의 조각들, 그 위로 피어난 작은 꽃들을 밟지 않으려 조심한다. 때로는 눈물이 그 꽃잎에 떨어져 작은 이슬이 된다. 그러나 그 이슬조차 그 꽃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슬픔은 언제나 생을 깊게 만든다.
나는 매일 조금씩 피어난다. 어제보다 단단하게, 어제보다 조용하게. 불에 그을린 날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이 지나가야 꽃이 피고, 재가 되어야 향기가 난다.
오늘도 창가에 앉아 햇살을 본다. 먼지처럼 흩날리던 내 시간들이 이제는 빛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속삭인다.
“괜찮아. 불타버려도 좋아. 그 끝에서 우리는 다시 피어나니까.”
나는 믿는다. 모든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꽃이 핀다. 그리고 그 꽃은, 어제보다 더 깊은 향기로 피어난다. 그것이 인생의 순환이고, 살아 있다는 증거다.
재로부터, 그리고 꽃으로.
그렇게 나는 오늘도, 다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