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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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La Cathédrale Engloutie – The Sunken Cathedral〉, “바다에 잠긴 대성당”
버스를 탈 수 없게 된 이유는, 아주 사소한 사고 하나였다. 만삭이던 어느 가을날,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평소처럼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날따라 바람이 유난히 좋았고, 하늘은 놀랍도록 맑았다.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져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중심을 잃은 몸이 앞으로 쏠리며, 그대로 뒷자리 팔받침대 모서리에 꼬리뼈를 세게 부딪혔다. 찰나의 통증보다 심장이 먼저 내려앉았다. 배 속의 아이가 놀라진 않았을까, 그 두려움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금세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내 세상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듯했다.
그날 이후, 나는 버스를 타지 못했다. 처음엔 단순한 공포일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엔진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쿵쾅거렸고, 정류장에 서 있는 버스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손끝이 떨렸다. 눈앞의 세상이 그날처럼 한순간에 흔들릴 것만 같았다. 몸은 다쳤던 흔적조차 없는데, 마음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흔들림이 두려웠고, 멈춤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 버스 대신 길을, 속도 대신 호흡을 택했다. 걷는 동안엔 두려움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바람이 내 어깨를 스치고, 낙엽이 신발 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마음을 다독였다. 세상이 나를 기다려주는 기분이었다. 시월의 공기는 묘하게 사람을 위로한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 상처가 덧나지 않게 말려주는 계절의 손길.
사람들은 가을을 쓸쓸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쓸쓸함이 좋았다. 그 속엔 고요가 있고, 고요엔 위로가 있었다. 버스 안의 진동처럼 거칠게 흔들리던 내 마음도, 가을빛 아래에선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위로보다 더 확실한 치유는 이런 바람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정류장 앞을 지나칠 때면 아직도 본능처럼 시선을 돌리곤 한다. 차창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은 잠시 반짝이다 사라진다. 그들 사이 어딘가, 예전의 내가 앉아 있는 듯하다. 불안한 손끝으로 손잡이를 꼭 쥐고, 세상을 조심스레 바라보던 그 얼굴. 그때의 나는 세상이 나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아도, 내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는 걸.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예전처럼 숨이 막히진 않는다. 이제는 멀리서 버스를 바라보며 ‘그래, 언젠간 탈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늘도 나는 걷는다. 걷는다는 건 내게 일종의 기도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고, 햇살이 골목 사이로 스며든다. 한때 그토록 무겁게 느껴졌던 세상이 오늘은 조금 가볍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은행잎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축복처럼 보인다. 오래 전의 그날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이제는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날의 나는 다쳤지만, 그 상처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벤치에 앉았다. 따뜻한 김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입안에 닿는 쌉싸래한 맛이 좋았다. 인생도 이 커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쓰지만, 천천히 음미하면 단맛이 남는다. 그 단맛을 알게 되면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멀리서 버스가 지나갔다. 도로 위를 천천히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살짝 조여왔지만, 이번엔 두렵지 않았다. 단지 그날의 내가 떠올랐을 뿐이다. 여전히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제는 그 불안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 ‘괜찮다’는 말이 마음속에서 아주 천천히 피어올랐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골목을 붉게 물들였다. 노을빛이 가로수 사이로 스며들어, 세상이 부드럽게 빛났다.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속에서 오래 묶인 매듭 하나가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두려움이, 마침내 손끝에서 흘러내렸다.
집으로 돌아와 커튼을 젖히니 달빛이 창문으로 흘러들었다. 방 안의 공기가 고요했다. 나는 불을 끄고 그 빛 속에 앉았다. 달빛은 마치 오래된 상처 위를 천천히 어루만지는 손길 같았다. 그 빛 아래서 나는 속삭였다. “괜찮아. 이제 정말 괜찮아.” 마음 한가운데서 작은 떨림이 일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안도였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은 그런 날이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누군가의 위로가 없어도, 마음 한편에서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날. 나에게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버스를 타지 않아도,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움직임 속에서 조금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걷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스쳤다. 낙엽이 흩날리고, 달빛이 길 위에 닿았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토록 조용한 날에도, 삶은 이렇게 멋지게 살아 있었다.” 그 말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마음이 아주 천천히,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