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장|사계절의 끝

어둠 속에서 다시 피어난 나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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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지는 터널을 걷는 것 같다.
어디가 출구인지 모른 채, 사계절을 통째로 품은 어둠 속을.
그 길 위에서 나는 수없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났다.
때로는 한 줄기 빛이 스쳐갔고, 때로는 그 빛조차 사라져 버린 순간도 있었다.
지옥에 다다른 것만 같던 그 시절, 나는 묻곤 했다.
이 끝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봄의 끝자락에선 꽃이 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바람을 타고 떨어지는 꽃잎이 그렇게도 쓸쓸할 줄은 몰랐다.
누군가는 봄을 희망의 계절이라 말하지만, 나에게 봄은 늘 이별의 계절이었다.
꽃이 질 때마다 내 마음도 조금씩 부서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은 피었다.
피어나야만 지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봄을 보며 나는 알았다.
사람의 마음도 꽃과 같다는 걸.
아무리 지더라도, 다음을 위해 피어나는 법을 잊지 않는다.

여름의 끝은 무겁고 숨이 막혔다.
한낮의 열기 아래, 아스팔트는 숨을 쉬며 타올랐고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그늘 하나 없는 도심을 걷는 일은 나를 시험하는 듯했다.
물 한 모금보다 더 갈급했던 건 존재의 이유였다.
“나는 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그 질문은 여름의 열기보다 뜨겁게 내 속을 태웠다.
삶이란 결국 자신과의 대화이기에,
그날의 나는 그 질문 하나로 온종일을 버텼다.
여름의 끝은 언제나 불안과 열망이 교차하는 계절이었다.
무너짐은 끝이 아니라, 다음을 향한 진통이라는 걸 그제야 이해했다.

가을의 끝에는 오래된 기억들이 낙엽처럼 흩날렸다.
거리를 스치는 바람에 누군가의 이름이 섞여 들려왔다.
불러보지 못한 이름, 끝내 닿지 못한 인사,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
가을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갈무리하는 계절이었다.
잎이 떨어지듯, 관계도 그렇게 스르르 흩어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모든 이별은 계절의 일부라는 것을.
결국 만남은 이별을 품은 형태로 찾아오고,
그 이별이 세상을 돌게 만든다는 것을.

가을의 끝자락, 나는 벤치 위에 앉아 오래된 편지 한 장을 펼쳤다.
이미 잉크가 번져 읽을 수 없었지만, 그때의 온기가 손끝에 남아 있었다.
사람이 그리운 건,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련이 아직 다 타지 않았기 때문일까.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 편지를 놓지 못한 채, 나는 불씨 같은 감정을 손에 쥐었다.
그 미약한 온기로 나는 겨울을 준비했다.

겨울의 끝은 고요했다.
눈이 내리고, 세상은 흰색의 침묵으로 덮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희미한 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멈춘 듯한 계절 속에서 오히려 내 마음은 또렷해졌다.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자, 비로소 내 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너는 아직 살아 있다.”
그 말 하나가 눈보다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겨울의 끝에서 나는 얼어붙은 마음속의 한 조각을 발견했다.
그건 오래 묻혀 있던 두려움이었다.
상처받을까 봐, 잃을까 봐, 그래서 더 움츠러들었던 나.
하지만 그 두려움이야말로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두려움이 없다면 봄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날, 결심했다.
다시 피어나리라.
끝이라 믿었던 이 겨울의 끝에서, 봄의 냄새를 맡으며.

사계절을 모두 지나왔을 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끝은 끝이 아니었다.
봄은 겨울의 잔해 위에 피어나고, 여름은 봄의 눈물 위에서 자라며,
가을은 여름의 열기를 식히고, 겨울은 가을의 그리움을 품는다.
모든 끝은 다음 계절의 서막이었다.
시간은 멈춘 적이 없었다.
그저 형태를 바꿔 흐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그 터널 속에서 주저앉곤 했다.
어둠이 너무 길었고, 빛은 늘 멀리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가까워진다는 걸.
어둠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빛이 자라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봄의 씨앗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계절의 끝은 어쩌면 ‘나’였다.
모든 변화의 끝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났다.
봄의 나는 여리고, 여름의 나는 뜨거웠으며,
가을의 나는 사색했고, 겨울의 나는 잠들어 있었다.
그 모든 내가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를 새로 세운다.
무너지고, 다시 피어나며, 그렇게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

누군가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걷고 있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없이 걷는다.
그 계절이 무엇이든 결국 지나가리라는 걸 알기에.
그리고 그 끝에는 또 다른 내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기에.

사계절은 도는 바퀴처럼 흘러간다.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매번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봄은 다시 희망을 속삭이고, 여름은 불안을 태우며,
가을은 후회를 수확하고, 겨울은 침묵 속에서 위로를 배운다.
그 모든 과정이 나라는 이름의 사계절을 완성한다.

나는 지금도 터널을 걷고 있다.
가끔은 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가끔은 바람조차 멈춘 듯 고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길의 끝은 어둠도, 절망도 아니라는 걸.
그곳엔 언제나 새로운 계절이 기다리고 있다.
사계절의 끝은 끝이 아니다.
그건 또 한 번의 시작이다.

터널 끝에서, 나는 봄의 향기를 맡는다.
어디선가 흙냄새와 햇살이 섞여 스며든다.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눈을 감는다.
사계절의 끝, 그곳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