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모양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금세 허기가 졌다. 배는 부른데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밥 한 공기 더 뜨면 괜찮아질까, 단 것을 입에 넣으면 잠시라도 마음이 달콤해질까. 그렇게 채우려 애써도, 목구멍 아래 어딘가엔 늘 공기가 가득했다. 손으로 더듬으면 잡히지 않는 구멍, 그게 결핍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것을 사랑의 모양으로 착각해 왔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건, 단순히 누군가의 품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존재가 인정받지 못한 시간의 총합이다. “괜찮아”라는 말 대신 “왜 그랬어”가 먼저 돌아오는 집에서 자란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하다. 잘하고 싶어서 애쓰지만, 칭찬 한마디에 서툴다. 누가 따뜻하게 웃어주면 그게 혹시 자신을 조롱하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나는 그랬다. 누군가의 시선을 받으면 움츠러들고, 누군가의 손길이 닿으면 본능적으로 피했다. 그게 나의 결핍이 만들어낸 방어였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받은 만큼만 줄 수 있다. 사랑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는 법보다 먼저 의심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나는 늘 경계했다. ‘혹시 떠날까?’, ‘나를 싫어하게 될까?’라는 불안이 내 속을 갉아먹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도 마음을 다 보여주지 못했다. 미움받기 전에 먼저 등을 돌리는 게 내 방식이었다. 버림받는 게 두려워 먼저 버렸다. 그게 결핍의 습성이었다.
누군가는 자존감이 높으면 삶이 편해진다고 했다. 그 말은 아마 사랑을 충분히 받아본 사람의 언어였을 것이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힘이라지만, 그 힘이 자라기 위해선 처음부터 자신이 존중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나처럼 결핍으로 자란 사람에게 자존감은 ‘자존심’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부끄러워도 허세로 감추고, 상처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다. 그건 강함이 아니라 방어였다. 자존심이란 결국 사랑받지 못한 이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성벽이니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유연하다. 그들은 실수를 해도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을 비난해도, 그 비난이 곧 존재의 부정이라 느끼지 않는다. 반면 나는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도 무너졌다. “괜찮아?”라는 말조차 때로는 나를 측은하게 여긴다는 의미로 들려서 마음을 닫았다. 그럴수록 더 외로워지고, 외로움은 또다시 결핍을 불렀다. 악순환이었다.
한때 나는 먹는 걸로 그 구멍을 메우려 했다. 허기가 배가 아니라 마음에서 왔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야식으로, 달콤한 디저트로, 입안 가득한 포만감으로 공허를 덮었다. 하지만 음식은 위를 채울 뿐 마음까지는 닿지 못했다. 차갑게 식은 접시 위의 잔여물처럼, 허기는 매번 다시 찾아왔다. 먹어도, 울어도, 자도, 채워지지 않았다.
결핍은 언제부턴가 나의 정체가 되었다. ‘나는 왜 이리 불안할까’, ‘왜 아무리 사랑받아도 모자라다고 느낄까’ 스스로를 탓했지만, 결핍은 탓할 일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여야 할 운명 같은 것이었다. 사람마다 마음속엔 각자의 결핍이 있다. 어떤 이는 부모의 부재로, 어떤 이는 말 한마디의 상처로, 또 다른 이는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믿는 오래된 착각으로. 나의 결핍은 ‘존재의 허가’를 받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누군가 “넌 괜찮아, 그냥 너라서 괜찮아”라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늘 사랑에 굶주렸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곧바로 온 마음을 내어줬다. 그 사랑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사랑은 누군가에게서 빌려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 길러야 하는 감정이었다. 남이 채워주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은 결국 또다시 결핍의 변주였다. 누군가 떠나가면 나는 무너졌고, 남겨진 자리엔 공허와 자책만이 남았다.
결핍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단단하게 했다. 사랑받지 못한 이들은 사랑을 간절히 원하기에, 타인의 고통에 더 민감하다. 누가 울고 있으면 금세 눈치챈다. 자신이 외로워봤기에 외로운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결핍은 상처이자 감각이다. 그것이 내 안의 연약한 불빛으로 남아 타인의 어둠을 알아보게 한다.
이제는 안다. 결핍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는 걸. 다만 그 모자람을 껴안고 살아갈 수는 있다. 내 안의 허기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이 나를 이루는 한 부분으로 인정할 때, 결핍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나는 나의 결핍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때로는 그 결핍이 글이 되고, 문장이 되어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때가 있다. 그러면 잠시나마 허기가 잦아든다.
어쩌면 결핍은, 우리가 살아가며 끝없이 배우는 사랑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비워진 만큼 다시 채울 수 있고, 상처 난 만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니까. 사랑받지 못했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그 결핍 덕분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 나의 허기는 나를 망친 게 아니라, 나를 쓰게 만들었다고. 나는 여전히 허기지고, 여전히 사랑이 고프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예전엔 결핍을 부끄러워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의 생존 방식임을 안다. 내가 계속 살아 있고, 느끼고, 쓰는 이유가 바로 그 결핍이니까.
그러니 오늘도 나는 배가 고프다. 하지만 이제 그 허기는 두렵지 않다. 그건 사랑이 고프다는 신호이자,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증거니까. 결핍이 나를 비워내며 동시에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