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의 아름다움
하루가 너무 길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다.
웃음도, 눈물도, 사건도 없다. 그냥 시시하다.
세상이 멈춘 듯한 오후, 핸드폰 화면을 수십 번 켜봤지만 새로 온 메시지는 하나도 없다.
뉴스 속 세상은 여전히 떠들썩한데, 내 하루는 정지된 화면 같다.
커피를 내리며 생각한다. “왜 이렇게 모든 게 시시하지?”
어릴 적엔 모든 게 커다란 일처럼 느껴졌다.
비 오는 날 흙탕물을 밟으면 세계가 끝날 것 같았고, 좋아하는 아이가 이름을 불러주면 세상이 반짝였다.
하나의 말, 하나의 표정, 작은 사건 하나에도 마음이 요동쳤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일에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그저 스쳐 지나간다.
감정이 낡아버린 사람처럼, 나는 그저 ‘반응 없는 하루’를 살아간다.
시시하다는 말엔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
권태, 무기력,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체념.
모든 게 익숙해지고, 예상이 가능해지면 인생은 놀랍지 않다.
익숙함이 주는 안정 뒤엔 늘 지루함이 따라온다.
매일 똑같은 길을 걷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 안에서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지하철 안, 모두의 시선은 각자의 화면에 박혀 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한숨을 쉰다.
그 틈에서 나는 문득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게 정말 살아가는 건가?”
아니, 그냥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숨은 쉬지만 실감이 없다.
움직이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계속 살아간다.
시시하다고 투덜대면서도 아침이면 눈을 뜬다.
아마도 그게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지루함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으려는 마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그냥 살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루는, 어제와 닮은 오늘로 이어진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시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조차도 감사한 일 아닐까.
진짜 절망의 순간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시시하다는 말은, 아직 기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조금만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
조용히라도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신호.
길을 걷다 들꽃을 본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피어 있는 꽃.
그 작고 시시한 존재를 보고 문득 마음이 움직인다.
아, 세상은 여전히 무언가를 자라고 있구나.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여전히 견디고 있다.
그 모든 게 별일 아닌 듯 흘러가지만, 사실은 그것들이 세상을 지탱한다.
인생이 시시한 건, 그만큼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사건을 원했다.
심장을 두드리는 일, 내 삶을 뒤흔드는 일,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무언가.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대개 상처를 남겼다.
소란은 지나가면 공허만 남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결국 나는 깨달았다.
‘시시하다’는 말속에야말로 진짜 안도의 숨이 숨어 있다는 걸.
커피를 반쯤 마신 잔, 창문 사이로 흘러드는 햇살,
창문 틈새에서 흔들리는 커튼.
그 시시한 장면들 속에서 나는 생의 실감을 느낀다.
누가 봐도 아무 일 없는 오후지만, 그 고요 속엔 미세한 진동이 있다.
삶의 맥박은 요란하지 않다.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든다.
누군가의 화려한 일상을 보며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여행, 성공, 사랑, 그 모든 게 내겐 너무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결국엔 말한다. “이젠 다 시시해.”
결국 모든 사람은 언젠가 지루함의 자락 위에 앉는다.
그때부터가 진짜다.
그때 비로소 삶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시한 하루는 내 마음의 온도를 맞추는 시간이다.
요란한 감정 대신 잔잔한 숨을 배우는 시간.
사건이 없는 하루야말로, 마음이 회복되는 날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사실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던 날인지 모른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는 날.
그냥 내 안의 고요와 함께 있는 시간.
이제는 안다.
삶이 시시하다는 건, 더 이상 나를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무언가를 향해 뛰지 않아도, 여전히 나는 내 자리에 있다.
바람이 불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저녁이면 노을이 핀다.
그 평범한 반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진다.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 별일 없어?”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응, 아무 일도 없어.”
그 말이 예전엔 초라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따뜻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건, 세상이 아직 나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비극 속에 있지 않고, 내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시한 인생이라 부를지라도, 그 안에서 나는 여전히 반짝인다.
빛이 아니라 잿빛으로, 그러나 분명 살아 있는 색으로.
세상은 매일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때로는 아무 일도 없는 날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우리가 시시하다고 여긴 그 시간들이, 사실은 인생의 가장 깊은 문장들이다.
시시한 날들의 연속이 모여 삶을 만든다.
그 안엔 사랑도 있고, 상처도 있고, 회복도 있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래가는 것들.
평범해서 오히려 진짜인 것들.
나는 오늘도 그 속을 걸으며, 잔잔한 평화를 배운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말한다.
그래, 좀 시시해도 괜찮다고.
그 시시함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