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얼굴
하루하루는 참 간사하다. 어떤 날은 유난히 숨이 짧아지는 날이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가슴이 눅눅하게 가라앉고, 마치 오래된 지하 터널 속에 내가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 스멀거린다. 시멘트 냄새가 축축하게 달라붙고, 어둠이 벽 틈 사이에서 스르륵 내려앉아 내 어깨를 감싼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천장의 조명은 벌벌 떨며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깜빡거리고, 멀리서 들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마치 빗물이 아니라 심장 소리처럼 규칙 없이 튀어 오른다. 그렇게 나는 그 터널을 걷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걷고 또 걸어도 다음 풍경은 똑같고, 어둠은 오히려 더 짙어지고, 마침내 굵어진 빗방울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는 이상하다. 터널 안에서조차, 마치 나를 찾아내기라도 한 듯 퍼붓는다. 속도는 점점 더 빠르게, 소리는 점점 더 크게,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점점 더 작게 만든다. 그럴 때면 하루가 1년 같다. 아니, 어떤 날은 30년쯤 되는 것처럼 끝없이 늘어진다. 시간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길어진 것 같다. 감당해야 할 감정의 두께가 너무 많아서, 버텨야 할 무게가 너무 많아서, 하루라는 시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느린 걸음으로 터널을 걷게 된다.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데도, 다리에 힘이 붙지 않는다. 어둠이 이불처럼 덮여, 그 안에 누워버리고 싶은 충동만 커진다.
그러다 또 어떤 날은 거짓말처럼 가벼워진다. 마치 어제의 비가 오늘의 햇빛을 위해 일부러 쏟아졌던 것처럼, 나는 갑자기 밝은 터널 위로 올라온다. 아침 햇살이 어깨 위에 스르륵 닿고, 찬 공기가 폐 끝까지 시원하게 내려가며 마음을 정리해 준다. 이유도 없이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하루가 먼저 다가와 나를 어루만진다. 그럴 때면 나는 문득 웃음이 난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뭐가 그렇게 달라졌는지 모를 만큼 마음이 포근해진다. 사람도 아닌데, 하루가 나를 이렇게 설레게 만든다는 게 신기하다. 마치 긴 침묵 끝에 갑자기 손등을 스치며 괜찮다고 말하는 누군가처럼.
하지만 하루하루가 늘 이렇게 다정한 건 아니다. 어떤 날은 가차 없다. 마치 모질게 이별을 통보하고 뒤돌아선 전 남자 친구처럼, 하루는 내게 상처를 내고는 쿨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 남자는 늘 태도가 빨랐다. 다정함을 건네는 손도 빠르고, 떠나가는 발걸음도 빨랐다. 하루도 그렇다. 잠시 나를 안심시키고, 기대하게 하고, 마음을 풀어놓게 만들다가, 갑자기 칼바람 같은 한마디를 툭 던져놓고 멀어진다. “오늘은 좀 버텨봐. 난 네 편이 아니야.” 그런 느낌의 하루가 있다. 분명히 같은 하루인데도,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 돌아온다. 누군가 내 뒤통수를 쳤다기보다, 하루라는 존재가 스스로 변장을 하고 나타나는 것 같다.
하루하루는 참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햇빛 같은 날도 있고, 비구름 같은 날도 있고, 바람이 선선한 날도 있지만, 그보다 더 다양한 표정은 ‘마음의 날씨’다. 언제 비가 내릴지, 언제 갤지, 언제 다시 어두워질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루는 늘 나를 긴장시키고, 또 기대하게 만든다. 그 모순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살아진다. 흐린 날에는 더 깊게 침잠하고, 맑은 날에는 더 높이 올라가고, 중간쯤 되는 날에는 잠시 쉬어갈 여유를 배운다.
그런데, 이 모든 하루가 결국 나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 터널을 걸을 때에는 막막했지만, 돌아보면 그곳에서 단단해졌다. 비를 맞을 때에는 버거웠지만, 돌아보면 그 물기가 나를 씻어냈다. 전 남자 친구 같은 하루에게 상처받았을 때에는 가슴이 무너졌지만, 돌아보면 그 자리에서 새로운 마음이 피어올랐다. 하루는 나를 흔들었고, 나는 흔들리며 조금씩 사람이 되어갔다. 어쩌면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 단단해졌다가 무너졌다가, 다시 조립되기를 반복하며 삶이라는 어둠과 빛 사이를 헤매고,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춰, 지금의 내가 이전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의 하루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결국엔 받아들이게 된다. 어둡든, 차갑든, 맑든, 비치든, 하루는 흘러가고 또 돌아온다. 오늘이 나를 울리면 내일은 잠시 달래줄 것이고, 내일이 나를 미소 짓게 하면 모레는 다시 시험할지도 모른다. 그 모든 변화가 나를 흔들고, 그 흔들림이 결국 나를 살게 만든다.
그러니 오늘 하루가 혹시 터널이라 해도, 비가 쏟아지는 날이라 해도, 잔인한 전 남자 친구 같은 날이라 해도 괜찮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또렷해지고, 비가 거세질수록 공기는 더 맑아지며, 아픔이 깊을수록 단단함도 깊어진다. 하루하루의 얼굴은 변덕이지만, 그 변덕이 나를 앞으로 밀고 간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묻는다.
당신의 오늘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