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비를 싫어하는 날에도 흔들리는 마음

by Helia

솔직히 말하면, 나는 비 오는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바깥공기가 묵직하게 눅눅해지는 것도 싫고, 몸에 달라붙는 습기 때문에 하루가 괜히 늘어진다는 느낌도 싫다. 우산을 들어야 하는 손의 번거로움, 젖은 신발에서 올라오는 축축한 기운, 동네를 스치고 지나가는 꿉꿉한 냄새까지. 비가 내리는 날이면 온 세상이 잠깐씩 눅진해지는 느낌이 있는데, 그게 늘 나를 조금 지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집 안에서 바라보는 비는 또 나름 괜찮다. 창틀에 부딪히는 빗소리, 유리창을 흘러내리는 물길, 고요하게 젖어가는 골목 풍경. 비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은 늘 양면적이다. 밖에서 만나는 비는 싫고, 집에서 바라보는 비는 좋다. 젖는 건 싫은데 마음이 젖는 건 또 싫지 않다. 어쩌면 비라는 건 원래부터 사람 마음의 가장 솔직한 부분을 건드리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낮엔 비가 오지 않았지만 하늘은 종일 흐렸다. 바람도 조금 축축했고, 공기 중에는 비가 오기 전의 특유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다. 일기예보에선 밤늦게 비가 올 거라고 했다. 그래서 마음도 그 정도로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하늘은 늘 그렇듯 예보 따위는 참고만 할 뿐 결국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는 존재였다.

나는 인천대공원 만의골에 있는 카페 클랑에 있었다. 예전부터 자주 가던 곳이라, 그곳만의 공기와 정서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날도 클랑에 앉아 티라미수와 딸기라테를 천천히 즐기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진 않았지만, 티라미수의 달콤함과 딸기라테의 부드러운 향이 조용히 스며들어 하루의 무게를 조금 덜어주는 듯했다.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사장님께서 늘 그러시듯 소금빵과 따뜻한 차 한 잔을 조심스레 내어주셨다.

그 순간, 마음이 찡했다.
이 작은 친절이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매번 갈 때마다 챙겨주시는 그 다정함이 고마워서,
받는 입장임에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어제는 유난히 다행이었다.
가방에 내가 만든 고구마빵을 몇 개 넣어왔기 때문이다.
받기만 하는 게 늘 마음 한구석에 걸렸는데,
이번엔 아주 작은 마음이라도 건넬 수 있었다.
비록 정성의 크기를 비교한다면 사장님이 주신 따뜻한 차 한 잔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돌려드릴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환해졌다.

클랑을 나왔을 때, 하늘은 여전히 흐려 있었다.
바람은 축축했고, 공기에는 물기처럼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무게가 걸려 있었다.
몇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어깨 위로 ‘똑’ 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홉 시도되기 전이었다.
예보에서 말하던 ‘밤늦게’와는 거리가 먼 시간.
하늘은 결국 참지 못했다.
낮 동안 눌러두었던 감정을 먼저 흘렸는지도 모른다.

또 한 방울.
그리고 또 한 방울.
조심스럽던 빗방울은 금세 굵어졌고,
이내 쏟아지듯 퍼붓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 새도 없이 비는 순식간에 세상을 장악했다.
인천대공원 앞 숲길의 어둠이 더 짙어지고,
나무 잎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마치 무언가 오래 버티던 것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울림을 만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멈췄다.
비가 싫은데도 멈춰 섰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마치 비가 내 감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탁—탁—탁—
비는 늘 내면의 가장 깊은 목소리를 불러낸다.

걷기 시작하려 했지만, 마음이 먼저 걸음을 붙잡았다.
굵어진 빗줄기가 세차게 떨어지며 허공을 가르고,
그 사이로 가로등이 금빛 실처럼 흘러내렸다.
어째서인지 그 풍경이 오래된 감정을 불러왔다.
기억이라는 건 비에 약한 존재라서,
젖기 시작하면 금세 떠오르고 만다.

걸음을 옮기다 보니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겨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남긴 발자국들이 잔물결을 만들어냈고,
그 잔물결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사람 마음도 저 잔물결과 다르지 않다는 걸.
금세 흔들리고 금세 가라앉는다.
잠깐 요동친다고 해서 금 가거나 부서지는 건 아니다.
물결은 결국 다시 고요해지고,
마음도 결국 제자리를 찾아온다.

비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비가 내 마음을 흔드는 방식은 싫지 않았다.
뭔가를 흔들고, 젖게 하고,
그리고 다시 고요를 찾아오게 만드는 과정.
어쩌면 비라는 건 내 마음이 정리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리듬일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할 즈음, 비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젖은 옷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습기가 느껴졌지만
창밖으로 흐르는 빗물은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나는 여전히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
밖에서 만나는 비는 여전히 귀찮고, 꿉꿉하고, 축축하다.
하지만 집 안에서 바라보는 비는 좋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물길,
방 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빗소리,
젖은 골목의 조용한 움직임.
비 오는 날이 싫으면서도,
바라보는 건 또 좋다는 이 감정의 양면성이
나를 끝내 비 앞에 머물게 한다.

어제의 비도 그랬다.
밖에서는 나를 젖게 했지만,
집 안에서는 내 마음을 조금 맑게 했다.
특유의 꿉꿉함은 싫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던 작은 고요는 분명 나를 살짝 달라지게 했다.

비 오는 날, 나는 싫어하면서도 좋아한다.
불편해하면서도 빠져든다.
젖으면서도 맑아지고,
싫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바라보고 만다.

어제 내린 비는 그 모든 모순을 품고 내게 내려왔다.
그리고 그 모순 덕분에
나는 또 한 번, 아주 조금 투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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